제17차 무형문화유산 보호 정부간위원회
차별과 혐오의 역사가 담긴 기록물이나 유산은 지난날의 과오를 기억하고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 자체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차별과 혐오를 ‘현재진행형’으로 즐기는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어떨까? 단지 과거 사람들의 시각을 반영한 것일 뿐이므로 그 자체로 소중한 유산이라 말할 수 있을까? 지난해 11월 말 열린 제17차 무형문화유산 보호 정부간위원회에서 이에 대한 주목할 만한 결정이 나왔다.
2022년 11월 28일,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아프리카 대륙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모로코왕국에서 제17차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 정부간위원회가 열렸다. 환한 오렌지색 흙으로 장식된 성벽이 인상적인 왕궁 옆으로 시원스레 뻗은 도로를 달려 회의장 입구에 도착했다. 짙푸른 바닷속 범고래를 연상시키는 푸른색의 회의장은 수많은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참가자는 입구 오른쪽 등록센터에서 빨강(한국을 포함한 위원국), 초록(위원국이 아닌 회원국), 노랑(옵서버)의 각기 다른 색 뱃지를 받아 입장했다. 회의장 입구에서는 무형유산 보호 정부간위원회를 구성하는 24개 위원국의 대형 국기가 유엔 깃발을 중앙에 두고 참가자들을 맞이했다. 오늘부터 6일간 열리는 제17차 정부간위원회에서 처리할 안건은 모두 27개. 그중에서도 회의장 안팎으로 이목을 끈 안건은 7.b와 8번 안건이었다.
7.b 안건 바로 앞까지는 의장의 “어댑티드”(Adapted, 안건 채택합니다)라는 발언과 함께 “땅땅땅”하는 의사봉 소리가 연이어 울리며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하지만 7.b 안건이 상정되자 회의장에는 일순간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7.b는 다름 아닌 협약 당사국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집중하는 ‘유네스코 무형유산 대표목록’ 신규 등재 안건이다. 통상 협약 가입국이 등재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접수하면 심사기구가 신청서를 바탕으로 심사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위원회에서 최종 채택 여부를 다룬다. 위원회 개최 전 심사기구가 심사한 대표목록 등재신청서는 총 46건. 심사기구는 이 중에서 31건은 등재권고, 14건은 정보보완 요청, 1건은 합의 불가의 의견을 냈다. 제17차 위원회는 이 가운데 39건에 대해 등재 결정을 내렸다. 북한이 신청서를 제출한 ‘평양랭면 풍습(Pyongyang Raengmyon custom)’과 우리나라가 신청한 ‘탈춤, 대한민국의 가면극(Talchum, mask dance drama in the Republic of Korea)’은 잇따라 토론 없이 채택됐다. 등재 결정 후 북한은 주유네스코 대사가, 우리나라는 문화재청장이 발언을 통해 위원회와 심사기구에 감사 의견을 전달했다. 한편, 쿠바가 신청한 ‘라이트 럼 제조 장인의 지식’ 등 일부 신청안은 장시간의 질의와 답변, 문구 수정 등을 거쳐 채택됐다.
8번 안건에 이르자 회의장은 긴장감을 넘어 전운이 감도는 느낌마저 들었다. 참가국의 발언 가운데 격앙된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협약 상 목록에 등재된 유산 종목 관련 후속조치’를 다루는 8번 안건은 지난 수 년간 회원국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안건이다. 여기서 말하는 후속 조치란 2019년에 벨기에의 한 시민단체가 유네스코에 접수한 진정에 대한 조치를 말한다. 이 단체는 지난 2008년 벨기에와 프랑스가 공동 등재한 ‘벨기에와 프랑스의 거인과 용들의 행렬’ 유산 중 벨기에 도시인 아트(Arth)에서 해마다 열리는 가장행렬에 등장하는 흑인 노예 분장 캐릭터가 인종차별과 인종혐오를 조장한다고 주장하며 진정을 냈다. 해당 가장행렬에서는 백인이 얼굴과 몸에 검은 페인트를 바르고 아프리카 원주민의 깃털 모자를 쓰고, 코에는 소의코뚜레 같은 커다란 고리를, 목에는 노예를 연상시키는 사슬을 매단 채 축제를 구경하는 어린이에게 다가가 겁을 주고 아이가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며 깔깔 웃는다. 이러한 내용이 알려지자 인권단체는 물론 국제사회에서 커다란 공분이 일었다.
이에 대해 벨기에는 그간 ‘어떠한 형태의 인종차별도 강력히 반대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내면서도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반면 노예무역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나라들은 해당 무형유산에서 아트 지역의 가장행렬을 즉각 삭제할 것을 주장했다. 이번 회의에서도 여기에 대해 긴 토론이 이어졌고, 아프리카에서 열린 회의인 만큼 그 어느 때보다도 삭제안을 채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셌다. 결국 당사국인 벨기에 대표도 아트 가장행렬을 유네스코 무형유산에서 삭제하는 데 동의하면서 삭제안이 채택됐다. 스위스 대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해당 가장행렬에서 흑인 캐릭터를 없앨 것을 강력히 희망한다는 제안을 제기해 그 내용이 결의에 반영됐다. 2003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무형문화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이 채택된 이래 무형유산 목록에 등재된 유산의 전부 혹은 일부 삭제가 이루어진 사례는 지난 2019년 유대인 차별과 혐오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목록에서 삭제된 벨기에의 알스트 축제(Aalst Carnival) 이후 이번이 두 번째다.
위원국들은 오는 12월 남아프리카에 위치한 보츠와나의 수도 가보로네에서 제18차 위원회를 열기로 했다. ‘어떠한 인종차별과 혐오도 유네스코 유산 목록에 설 자리가 없다’는 역사적 결정이 나온 제17차 위원회에 이어, 다음 위원회에서는 또 어떤 의미가 담긴 결정들이 나올지 관심을 갖고 함께 지켜보자.
김용범
문화커뮤니케이션팀 선임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