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해소 노력 촉구한 에릭남의 『타임』 기고문
지난 3월 16일에 미국 애틀랜타에서 아시아 여성들을 상대로 일어난 잔혹한 테러 사건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사건 이후 각계각층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더욱 심해지고 있는 차별과 증오범죄에 대한 비판과 경고를 보내고 있는 가운데, 유네스코의 활동에 많은 관심과 지지를 보내 온 가수 에릭남(Eric Nam)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글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에 실었다.
여섯 명의 아시아 여성들을 포함한 여덟 명의 시민들이 무참히 살해당한 사건을 두고 검사와 사법 당국이 이 사건을 혐오범죄로 볼 것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동안, 나를 포함한 수백만의 아시아∙태평양계 미국인(AAPI: Asian American Pacific Islander)은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동시에 우리가 사랑하는 이 나라에서 우리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애틀랜타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이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다. 피해자 중에는 내가 어렸을 때 뛰놀던 곳 근처에서 살해당한 사람도 있었다. 충격과 괴로움, 절망, 분노 속에서 나는 지난 1년간 아시아∙태평양계에 대한 폭력이 급증했음에도 우리가 보낸 청원과 경고의 메시지가 마치 다른 나라의 이야기인양 취급되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아시아∙태평양계 미국인으로서 살아가는 경험 속에는 불안과 트라우마, 정체성의 위기가 가득하다. 우월주의와 구조적 인종주의에 기반한 미국 문화의 복잡한 역사는 결코 단일하지 않은 다양한 커뮤니티에 의해 더욱 복잡성을 띤다. 여기서 아시아인들은 문화적·정치적으로 ‘영원한 이방인’이면서도 ‘모범적 소수계’(model minority)라는 신화의 대상이 된다. 받아들여지되 완전히 융합되지 못하고, 그저 ‘괜찮다’는 말로 얼버무려지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배제되고, 억류되고, 비방당하고, 훼손되고, 도착(fetish)의 대상이 되고, 살해당해 왔다.
한동안 나는 우리가 이 불편한 위치에 처하게 된 이유가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미국인으로 보이고 싶었고, 보통의 미국인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인정받기를 원했다. 또한 머리색이 다르고, 집에서는 영어를 쓰지 않고, 비주류라는 사실 때문에 그저 이만큼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우리를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선이 잘못된 게 아니라, 미국인들이 부르기 어려운 이름을 사용하고 이상한 모국어를 쓰며 친구들과 선생님이 눈살을 찌푸릴 간식을 학교에 가져간 우리의 잘못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인종주의에 순응하고, 결과적으로 공모함으로써 우리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을 당연하게 만들어 왔다. 하지만 미국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차별을 감수하면서도 ‘괜찮다’고 믿으며 자라는 것은 결코 괜찮은 일이 아니다. 어릴적부터 인종주의를 내면화하다 보면 결국 무엇이 정상인지에 대한 감각도 왜곡되기 때문이다. 10대 때 뺑소니 사고를 당한 일이 있는데, 당시 가해자가 오히려 우리 차 창문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이 멍청한 빌어먹을 중국놈!”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우리가 잘못한 건지 물었다. 가해자에게 되려 사과하고 싶은 심정을 상상할 수 있는가? 아시아∙태평양계 미국인으로 자란다는 것은 이렇게 혼란스럽고 복잡한 문제다.
다오유 펑(44), 델라이나 애슐리 야운 곤잘레스(33), 순자 김(69), 현정 그랜트(51), 순 C. 박(74), 샤오지에 탕(49), 폴 안드레 미셸(54)과 영아 유(63)의 살해에 인종차별적 동기가 없었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지하며 차별적인 말이다. 치안담당관 사무소 대변인의 표현대로 그저 누군가에게 “힘든 하루”였을 뿐이라며 희생자들의 삶을 비인간화하거나, 범행 이유를 ‘성중독’ 탓으로 돌리는 것은, 백인우월주의의 정점을 보여주는 일이자 한 인종의 성별 전체를 과도하게 성애화하고 성적 대상화하는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도대체 왜 우리 공동체의 (아시아계) 여성들이 성중독의 분출구이자 희생자가 되어야 하는가. 어떻게 그럴수가 있는가.
이번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잘못되었고 비극적이지만, 이것이 지금까지 그래 온 방식이자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왜 지금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나”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분명히 말하건대 우리는 늘 도움을 청해 왔고, 지난 몇 년간 다른 그 어느때보다도 그러했다. 다만 당신들이 귀 기울이지 않았고,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침묵을 지키는 것은 동조나 마찬가지인만큼, 이제는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기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모든 거대한 변화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아시아∙태평양계 공동체와 사업체의 힘을 키우고 지원하는 것, 혐오범죄의 변수와 처벌 문제를 재검토하는 것, 빠르게 변화하는 시민 의식에 발맞춰 진화하는 미국의 위대한 실험에 함께 동참하는 것, 이 모두가 변화의 시작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전부는 아니며, 또 계속 변하겠지만, 시작점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중 한 명에 대한 공격이 우리 모두에 대한 공격인 것처럼, 변화 역시 우리 중 한 명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은 희망을 갖게 해 준다. 그 한 명이 바로 당신일 수 있다. 이 땅 어디에 살고 있든 우리의 경험을 이해하고 지역 공동체의 상품을 구입하며, 단지 불평등을 바로잡는 것을 넘어 더 많은 기회를 만들어 갈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말이다.
이번 사건 때문에 상처받고, 지치고,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차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견뎌야 하며, 바로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가 간절히 원하는 변화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한다.
『타임』 기사 원문 에릭남(Eric Nam)
원문 번역 | 장지원 커뮤니케이션팀 선임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