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에 열린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근대산업유산의 등재 후속조치 이행을 촉구하는 결정문이 채택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유산 등재가 단지 영광스런 열매가 아니라 막중한 책임의 시작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세계유산 등재가 가져다 주는 의무와 책임, 그리고 유산 등재와 함께 발생하는 전 세계 및 우리 후손들과의 약속은 얼마나 무거운 것이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일까.
유산 등재, 끝이 아닌 또다른 시작
지난 7월 16일부터 31일까지 열린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갯벌’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됨으로써 한국은 모두 15건의 세계유산을 갖게 됐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순간 해당 유산은 개별 국가나 민족의 유산을 넘어 인류 전체의 보물이 된다. 등재 신청국은 심사 과정에서 유산이 그러한 가치를 충분히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고, 세계유산위원회의 전문가들은 객관적인 평가를 거쳐 이를 인정한다. 유산 등재를 마치 올림픽 금메달처럼 영광스러운 트로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심사 과정이 간단치 않으며 그 결과를 전 세계가 신뢰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일은 관계자들이 축배를 들고, 지역주민들은 ‘관광특수’를 기대하며 세계유산이 가져다 줄 혜택을 가늠해 보면 되는 것일까?
하지만 세계유산 등재와 동시에, 그 유산을 잘 가꾸고 보전하는 무거운 책임 또한 당연하게 따라붙는다. 세계유산 등재가 그간의 노력에 대한 영예로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유산 등재 효력은 원칙적으로 무기한 지속되지만, 이는 해당 유산을 등재한 회원국이 등재 신청을 하면서 약속한 유산의 가치를 지켜 나가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번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컨센서스(합의)로 채택된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후속조치 이행 촉구 결정문’을 봐도 알 수 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이 2015년 해당 유산 등재 당시 받아들인 위원회의 권고 및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한 약속을 아직까지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이러한 사실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함으로써 국제사회가 유산 등재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일본의 책임있는 조치를 기다리고 있음을 재확인했다. 이제 일본은 ▲각 시설의 전체 역사 해석전략 ▲한국인 등 강제노역 이해 조치 ▲희생자 추모 조치 ▲국제 모범 사례 ▲당사자간 대화의 다섯 가지 사항을 포함한 공동조사단 보고서의 결론을 충분히 반영해 내년 12월 1일까지 이행경과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며, 이는 2023년 제46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다시 검토될 예정이다.
결정문 채택의 진짜 의미
세계유산위원회의 이같은 결정문 채택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지면서 이제 ‘그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해당 유산 지역에서 발생했던 강제노동의 피해국이자,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일본의 강력한 반발로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 국민들이 갖는 관심은 더욱 크다.
사실 많은 한국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갖는 관심을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일본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등재가 취소될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으로 대체할 수 있다. 세계유산의 보호조치와 관리가 미흡해 유산의 가치가 현저히 훼손될 경우 세계유산 등재가 취소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유산 해석 전략과 관련한 이번 문제가 ‘유산의 보호 및 관리 미흡’에 해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뿐더러, 이번 결정문이 전 세계 회원국에 전하는 진짜 메시지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역시 이번 결정문을 단순한 ‘한-일 간의 외교적 승부’로 보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일본에 ‘전체 역사’를 소개할 것을 요구하는 이유는 국가 간의 대립 사안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유산과 관련해 앞으로 보다 널리, 보편적으로 적용돼야 할 올바른 유산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지난 2016년부터 매번 세계유산위원회 개최 직전에 서울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해석 국제회의’를 개최해 오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 회의를 통해 유네스코와 회원국들은 특정 유산이 갖고 있는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이를 충실히 전달하는 것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해 왔다.
등재 후에 남는 숙제
보편적 가치를 담은 유산의 해석 전략 수립에 관한 세계유산위원회의 당부와는 별개로, 세계유산을 보유한 회원국들이 등재 당시 약속한 유산의 가치 보존을 위한 조치들을 빠짐없이 이행해야 할 의무가 막중하다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이는 갯벌 등재 과정에서 향후 추가적인 국내 갯벌 지역의 등재를 ‘약속’한 우리나라로서도 자세히 살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세계유산을 보유한 국가에 부과되는 가장 중요한 의무사항 중 하나는 유산의 보존 상태와 보호 활동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담은 정기보고서를 세계유산센터에 제출하는 것이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대륙별로 각 회원국이 6년 주기를 원칙으로 제출하는 이 보고서를 검토해 필요한 의견을 내고, 이를 유네스코 총회에 보고한다. 당사국은 정기보고서에 해당 유산의 핵심 등재 이유라 할 수 있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 OUV)’를 위협하는 요소들을 최대한 상세하게 기재하도록 돼 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OUV에 위협을 가하는 요소를 지난 2008년에 정리한 ‘정기보고서 섹션2 시행 질문지’(Questionnaire of the Periodic Reporting exercise (Section II))에 따라 14개 주요 위협(primary threat)과 각 항목별 세부 사항으로 분류해 놓았으며, 이 목록에 맞춰 정기보고서의 내용을 분류해 일관된 대응책을 마련하는 기초 자료로 삼는다.
만약 보고서 등을 통해 세계유산의 가치를 훼손하는 사례가 발견되면 해당 유산을 보유한 회원국은 세계유산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게 된다. 지난 2007년 러시아의 국영석유회사인 가즈프롬(Gazprom)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파리의 에펠탑 높이와 맞먹는 빌딩을 세우려는 계획을 발표하자 세계유산위원회는 해당 계획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계유산으로서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우려를 표했고, 이에 러시아 정부 및 시 당국은 기존 위치로부터 9km 떨어진 곳으로 빌딩 부지를 옮긴 바 있다.
세계유산을 위협하는 욕망
다수의 세계유산들은 세계유산위원회의 경고를 받은 뒤 전문가들의 권고에 따라 문제점을 개선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해당 유산은 세계유산위원회의 판단을 거쳐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World Heritage in Danger) 목록(이하 위험유산목록)에 등재된다. 이번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위험유산목록에 1개 유산이 새로 등재되고 2개 유산이 삭제됨으로써 총 52건의 세계유산이 위험유산목록에 올라 있는 상태다. 그 중에는 중동의 시리아, 아프리카의 콩고민주공화국과 리비아 등 분쟁이나 내전 상태에 처한 국가들의 유산들이 다수 포함돼 있지만,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나 미국의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 등 정치·경제적으로 안정된 국가의 유산들도 고층건물건설(비엔나)이나 주변지역개발(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 등의 이슈로 목록에 올라 있다.
위험유산목록에 오른 뒤에도 해당 유산의 가치를 저해하는 요인이 개선되지 않거나 오히려 더 악화되는 경우 해당 유산은 결국 등재 취소에 이르게 된다. 1972년 세계유산 제도가 시행된 이후 지금까지 등재가 취소된 사례는 모두 3건이 있었다. 그 최초의 사례는 1994년에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가 2007년에 취소된 오만의 아라비안 오릭스(Arabian Oryx; 영양의 일종인 초식동물) 보호구역이다. 세계유산위원회는 1996년에 450마리에 달했던 아라비안 오릭스의 개체수가 서식지 파괴와 밀렵으로 65마리까지 감소하고, 오만 정부가 보호구역의 면적을 90%나 줄이자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 2009년에는 독일의 드레스덴 엘베 계곡 유산이 두 번째 등재 취소 사례에 올랐고, 이번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영국 리버풀의 해양산업도시 유산이 역대 세 번째로 세계유산목록에서 삭제되는 안타까움을 겪었다. 전체 취소 사례 3건 중 2건이 유럽에서, 그것도 ‘문화 선진국’임을 자부하는 영국과 독일에서 잇따라 나왔다는 사실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회원국들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두 사례의 등재 취소 원인이 공통적으로 유산 지역의 개발과 관련돼 있다는 사실은 세계유산의 등재 이후 유산의 보존과 지역 주민들의 개발 욕구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는 일이 결코 간단치 않은 일임을 보여준다. 드레스덴에서는 도심 교통난 해소를 위해 엘베 계곡을 가로지르는 4차선 다리를 유산 지역 내 핵심 구역인 구시가 근처에 놓는 것이 문제가 됐다. 리버풀의 경우 해당 항구 유산 지역 안팎에 5만여 석 규모의 축구경기장 신설을 포함한 대규모 상업 지구 건설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등재 취소의 핵심 이유였다. 결과적으로 드레스덴과 리버풀에서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담은 유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역 주민들의 생활 편의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 앞에 무릎을 꿇은 셈이다. 드레스덴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주민들의 57%는 “다리 때문에 세계유산 타이틀을 잃어도 상관 없다”고 답했고, 다리 건설의 대안으로 제시된 하저 터널 건설안은 비용 문제로 부결됐다. 리버풀 역시 바닷가 도심에 있으면서도 유산 보호를 이유로 오랫동안 개발하지 못했던 지역에 대규모 상업 시설과 오피스, 경기장을 짓기로 하면서 “여기서 유입되는 자금으로 리버풀의 유산은 그 어느때보다 좋은 상태로 보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개발론자들의 손을 잡았다. 1848년부터 1988년까지 석탄 수출과 증기선 기착지로 쓰였던 유서깊은 브램리 무어 도크(Bramley Moore Dock)를 허물고 축구장을 짓는 것이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힐 것”이라는 유네스코의 주장에 대해 조앤 앤더슨(Joanne Anderson) 리버풀 시장은 “이곳을 그저 버려진 지역으로 남겨 두는 게 옳다는 유네스코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박하며, “(축구장 건립이) 도시 및 주민들의 미래에 긍정적 기여를 할 것”이라는 성명을 세계유산위원회의 등재 취소 결정 직후 내놓기도 했다.
모두의 유산, 모두의 미래
드레스덴과 리버풀의 사례는 세계유산의 등재와 보존도, 그 효력의 상실도, 결국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공감과 협조에 달려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세계유산이라는 타이틀은 분명 그 이름만으로도 지역 주민들이 유산에 관심을 갖고 유산 보호를 위해 긍정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을 높여준다. 하지만 유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언제나 한결같을 수는 없다. 유산 등재의 환호는 시간이 갈수록 옅어지기 마련이고 개발이 가져다줄 과실은 세월과 무관하게 달콤하기 때문이다. 유네스코와 세계유산위원회가 위험유산목록을 별도로 관리하는 이유 중 하나도 유산 보유 지역 주민들이 유산의 현 상태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더 이상의 훼손 방지를 위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메틸트 뢰슬러(Mechtild Rössler) 세계유산센터 소장도 위험유산목록 등재와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는 당사국에 ‘레드카드’를 흔들며 협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유산 보존을 도울) 우리 모두의 행동을 촉구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한 바 있다. 이처럼 세계유산 목록 등재를 통한 대중 인식을 높이는 것과 더불어 유네스코는 회원국들이 ‘지속가능관광’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을 마련토록 촉구하는 한편, 지역사회가 세계유산의 가치와 유산의 진정성, 완전성을 잘 유지하면서 이를 지속 가능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노력도 다각도로 기울이고 있다.
세계유산이 ‘인류의 보물’이라는 수사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의 보호 책임 역시 당사국뿐만 아니라 국제사회 전체가 함께 져야 한다. 2009년 독일 엘베 계곡 지역의 세계유산 등재 취소가 결정되자 마리아 헤수스 산 세군도(María Jesús San Segundo) 스페인 주유네스코대표부 대사는 “유산 보호에 실패할 때마다 우리 모두는 해당 국가의 고통을 공유하게 된다”며 안타까움을 표한 바 있다. 이는 세계유산이 ‘타국의 보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보물’임을 진심으로 인식할 때 나올 수 있는 말이며, 어쩌면 일본 근대산업유산과 관련한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마음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진정 ‘세계의 유산’이라면, “세계유산에 담긴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와 해석이 투명하고 책임있게 논의되고 기억되는 일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중요한 노력”이라는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바람도 일본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진정 ‘세계의 유산’이라면, 우리 역시 상대국 유산의 ‘낙마’를 기원하기 보다는 함께 그 유산의 가치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미래를 열어갈 수 있도록 보다 따뜻하고 진정성 있는 관심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 theGuardian.com “Bridge Takes Dresden Off Unesco World Heritage List”(2009)
· mofa.go.kr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후속조치 이행 촉구 결정문 채택”(2021.07.22 보도자료)
· smithsonianmag.com “Liverpool Loses Its Unesco World Heritage Status”(2021)
· unesco.or.kr “제4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일본근대산업유산 권고 채택을 환영합니다”(2021.07.23 성명서)
· whc.unesco.org “List of Factors Affecting the Properties”, “Oman’s Arabian Oryx Sanctuary: First Site Ever to be Deleted from UNESCO’s World Heritage List”, “Success Stories”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