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방문기] 유네스코 브릿지 아프리카 프로젝트 2014-07-04 (조회수 10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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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한국위원회(한위)는 ‘유네스코 브릿지 아프리카 프로젝트’를 통해 배움에 목마른 아프리카 이웃들에게 교육지원 활동을 하며 희망을 나누고 있다. 지난 3월에는 민동석 사무총장을 미롯한 한위 관계자들이 아프리카 프로젝트가 시행되고 있는 남아공 르완다 잠비아 짐바브웨 등 4개국을 방문해 현지 지역학습센터를 점검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듣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당시 한위 관계자들은 짐바브웨의 돔보샤와 지역학습센터에서 아주 특별한 문해교육생과 만날 수 있었다. 바로 94세의 나이에도 숫자와 글자를 익히며 소박한 미래를 꿈꾸는 만학도 샘 할아버지이다. 나이 앞에서도 무뎌지지 않는 샘 할아버지의 배움에 대한 열망은 작지만 깊은 울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또한 그런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열어주는 유네스코 브릿지 활동이 얼마나 값지고 중요한 일인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짐바브웨 돔도샤와 지역학습센터에서 만난 어린이)
‘돌로 만든 집’이라는 뜻을 가진 나라, 아프리카에서 아랍권 국가를 제외하고, 석조건축물(Great Zimbabwe)을 세계문화유산으로 가지고 있는 유일한 나라, 쇼나 부족의 석공예가 뛰어난 나라, 빅토리아 폭포를 가운데 두고 잠비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 예전 ‘로데시아’라는 이름을 가졌던, 비옥한 토지를 자랑하며 ‘식량창고’로 불렸던 나라, 세계 최고급 연초를 생산하는 나라. 이 나라는 어디일까? 바로 짐바브웨다.
짐바브웨 하면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지난 2008년 하이퍼인플레이션 때문에 수조 달러를 가지고도 빵 한 조각을 못 사먹는다고 외신에 보도되었던 일이다. 결국 100조 짐바브웨달러를 생산했다가 바로 폐기 처분하고, 미 달러화를 도입해야 했다. 이런 사전 지식 때문인지 짐바브웨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란 인식이 강했다. 지난 3월 26일, 4일간의 일정으로 짐바브웨로 떠나면서도 ‘과연 지금도 그럴까’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현장에서 맞닥뜨린 짐바브웨는 가난하지만 주민들의 순박한 미소가 인상적인 나라였다.
짐바브웨는 한위가 ‘유네스코 브릿지 아프리카 프로젝트’로 인연을 맺고 있는 국가 중 하나. 이 프로젝트는 교육 지원을 통해서 아프리카 최빈국의 자립을 돕고 삶의 희망을 나누는 한위의 역점 사업이다. 빵으로 당장의 허기를 채울 순 있지만,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는 이들 스스로 빵을 만들 수 있는 배움과 교육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한위가 벌써 3기 브릿지 활동가를 아프리카 5개국에 내보내게 됐으니, 나눔의 나이테도 제법 두터워지기 시작한 셈이다. 짐바브웨를 방문하기에 앞서 찾아간 잠비아의 치시코 지역학습센터에서도 현지 주민 및 교육생과 유네스코 브릿지 사이에서 싹트는 유대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지역학습센터 발전과 개선에 관한 의견을 구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교육생을 소득증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재봉과 셈하기, 그리고 재정관리 등을 위한 교육을 요청했다.
(유네스코 브릿지 아프리카 활동가들과 짐바브웨 돔보샤와 지역주민들)
남편 데려오겠다 약속한 치시코 여성들
한위는 아프리카 프로젝트를 통해 문해교육뿐만 아니라 현지에서 가장 필요한 교육이 이뤄지도록 ‘맞춤형 지원’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소통’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해가 다르게 대화의 폭과 깊이가 넓어지고 있었다. 치시코 지역학습센터의 큰 특징은 교육생 모두가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다음부터는 본인들의 남편을 문해교실에 데리고 올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 약속을 뒤로한 채 ‘짐바브웨의 지역학습센터 모습은 어떨까’라는 호기심을 가지고 길을 재촉했다.
3월 28일 마침내 브릿지 3기 이가람 활동가가 앞으로 1년을 보낼 짐바브웨 돔보샤와 지역학습센터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펼치는 문해교육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개선할 점은 무엇인지 현지 강사와 교육생들의 의견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사실 불과 1년여 전만 해도 돔보샤와 지역에는 주민들에게 글을 깨우쳐줄 문해강사도, 배우고자 하는 열정도 있었지만 변변한 배움의 장소가 없었다. 어머니들이 교육을 받으러 오면 아이들은 문해강사 집 앞 흙바닥에서 시간을 보내야했다. 50여 명에 이르는 성인 및 청년 교육생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현장에 나와 있던 브릿지 2기 김하림 활동가가 이들을 위해 유네스코 브릿지 아프리카 프로젝트를 통해 지원에 나섰다. 그 결과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문해강사의 집 앞에 기둥을 세우고 양철지붕을 올려 ‘지역학습센터’를 세울 수 있었다. 돔보샤와 지역학습센터에는 4세 어린이부터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두건을 맨 아주머니들 사이로 희끗희끗한 머리를 보이는 유일한 남성 교육생이 눈에 띄었다. 그가 바로 ‘데인저 샘’씨였다.
우리는 데인저 샘 씨를 만나서 두 번 놀랐는데, 처음은 그가 유일한 성인 남학생 이어서였고, 두 번째는 많아야 70세 정도로 보였던 그가 우리의 눈을 의심케 하는 ‘1921년 2월생’이라는 주민등록증을 보여줬을 때였다. 그때 가장 궁금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 이 94세의 할아버지를 문해교육을 받도록 움직이게 했을까?’하는 점이었다. 샘 할아버지는 90세가 될 때까지 교육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왜 돔보샤와 지역학습센터에 와서 문해교육을 받는 것일까. 샘 할아버지는 꿈 때문이라고 했다. 비문해자로 살면서 은행에 가도 제대로 본인의 이름과 서명을 하지 못해서 부끄러웠던 기억들, 그리고 마을 주민회의에서 본인의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어려웠던 점들, 그리고 평생 농부로 살면서 비료에 적혀있는 글들을 읽지 못해서 농작물 수확이 제자리걸음이었던 것들을 개선하고 싶은 꿈이 90세의 그를 문해 교실로 이끌었던 것이다.
지난 3년간 샘 할아버지에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앞으로는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할까. 문해교육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본인의 학습속도가 너무 느려 자식들이 문해강사에게 “다른 학생들을 진급시켜서 샘 할아버지만 1:1로 교육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재미난 간청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수셈과 재정지출, 예산편성 등의 ‘수해’(numeracy: 수를 세고, 계산할 줄 아는 문해능력)를 배워 셈을 아주 잘하신다고 한다. 앞으로 소박하지만, 자기만의 채소가게를 열어 제값 받고, 생산해낸 농작물들을 판매해보고 싶고, 손주들의 숙제를 돕고 싶다는 마음을 비쳤다.
망백(望百)의 나이에 떨리는 손으로 작은 공책에 글자와 숫자를 채워가는 샘 할아버지의 모습과 작은 채소가게를 열고 싶고, 손주들의 숙제를 도와주고 싶다는 말씀을 하시며 조금은 수줍어 하지만 열의에 가득찬 모습을 보면서 정말 배움에는 늦음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평생 배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몸소 보여주신 샘 할아버지께 감사하다.
■ 김태영 개발협력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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