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9일부터 24일까지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제41차 유네스코 총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오드레 아줄레 현 사무총장은 다음 4년 간 유네스코를 이끌 리더로 한 번 더 선출됐고, 모처럼 같은 공간에 모인 회원국들은 유네스코 창설 75주년을 한 목소리로 축하했다. 회원국들은 이와 더불어 인공지능(AI)과 오픈사이언스에 관한 두 권고를 채택함으로써 과학계의 발전 방향을 보다 인간적이고 포용적으로 이끌 중요한 이정표도 마련했다.
평화 향한 75년의 여정
11월 12일, 밤마다 반짝이는 조명으로 파리의 야경을 수놓는 에펠탑 한 가운데 파란색 배경의 유네스코 문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창립 75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날에 맞춰 그간 유네스코 본부의 보금자리가 되어 온 파리시가 준비한 선물이었다. 20개국 이상의 국가 정상들과 유네스코 친선대사인 배우 포레스트 휘태커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 및 내빈들이 모인 가운데 열린 이날 기념식에서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영상 축하메시지를 통해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에 유엔 시스템의 기둥으로서 탄생한” 유네스코의 지난날에 경의를 표했다. 그러면서 팬데믹 상황 속에서 양극화와 불평등, 환경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유네스코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라고 강조하며 “포용적이고 효과적이며 더욱 긴밀히 연결된 다자주의의 중심에서 인류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야 할” 주체로서 유네스코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했다.
75년 전, 불과 30년 사이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뒤 ‘국가 간 정치·경제적 타협에만 의존한 평화는 결코 지속될 수 없다’라는 공감대 속에서 탄생한 유네스코는 이번 제41차 총회 기간 동안 온·오프라인을 아우르는 행사와 전시를 열고 긴밀한 사회적 교류와 지적이며 도덕적인 연대를 통해 인류의 화합과 공영을 가능케 할 튼튼한 바탕을 만들어 온 기구의 발자취를 전 세계와 공유했다. 한편, 올해로 5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펼치고 있는 유네스코의 정부간 프로그램인 인간과 생물권 프로그램(Man and the Biosphere Programme, MAB) 역시 총회 회기 중인 11월 17일에 브라질의 환경 사진가 세바스티앙 살가도(Sebastião Salgado)와 생태연구가 제인 구달(Jane Goodall) 박사를 비롯한 여러 관계자들을 초빙해 대화와 토론의 자리를 마련했다.
조직의 위기 탈출 이후를 바라보는 리더십은
제41차 유네스코 총회 개회일인 11월 9일에는 오는 2025년 11월까지 유네스코 조직을 이끌 사무총장으로 오드레 아줄레(Audrey Azoulay) 현 사무총장이 회원국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연임에 성공했다. 총회에 사무총장 후보 추천권을 가진 집행이사회는 지난 10월 경쟁자 없이 단독으로 입후보한 아줄레 사무총장의 연임을 총회에 건의한 바 있으며, 이날 총회에서는 193개 회원국 중 169개국이 투표에 참가해 그중 155개국이 연임에 찬성했다. “이번 결과는 다시 우리 조직이 하나가 되었음을 증명해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재선 소감을 밝힌 아줄레 사무총장은 “지난 4년간 유네스코에 대한 외부의 신뢰를 다시 높여 왔고, 이는 결국 우리 스스로의 자신감을 높이는 과정이기도 했다”며, “분열을 가져올 수 있는 의제에서도 서로간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정치적 대립을 줄임으로써 (유네스코 조직이)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지난 4년간의 성과를 자평했다.
회원국들 사이에서는 아줄레 사무총장이 첫 번째 임기 동안 적극적으로 추진한 유네스코의 개혁 과제인 ‘유네스코 전략적 전환(UNESCO Strategic Transformation)’이 성공적으로 완수됐다고 평가받는 가운데, 2017년부터 올해까지 회원국의 대(對)유네스코 자발적 기여 예산 규모가 그 직전 기간에 비해 약 50% 늘어나는 등 미국의 유네스코 탈퇴 이후 지속돼 온 조직의 재정위기가 어느 정도 안정화됐다는 점도 아줄레 사무총장의 연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유네스코의 투표 결과를 전한 세계 주요 외신들은 아줄레 사무총장의 다음 임기 중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유네스코 복귀를 마무리하는 것을 꼽기도 했다. 『로이터』는 유네스코 내 익명 관계자를 인용해 “두 나라의 유네스코 복귀에 대한 긍정적 분위기가 감지된다”면서도 “(유네스코가 정식 회원국으로 받아들인) 팔레스타인을 회원국으로 두고 있는 유엔 기구에 정부가 분담금을 내지 못하도록 한 미국 국내법을 감안할 때 문제는 여전히 복잡할 수도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교육의 미래에 관한 세 가지 질문
11월 10일에는 아줄레 사무총장과 사흘레-워크 쥬드(Sahle-Work Zewde) 에티오피아 대통령이 함께 『교육의 미래 보고서』를 발표했다. ‘Reimagining Our Futures Together: A New Social Contract for Education’(우리의 미래를 함께 상상하기: 교육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계약)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보고서는 2050년 이후 미래교육에 대한 전망과 제언을 제시하고, 전 세계적인 미래교육 담론을 촉진하고자 유네스코가 의욕적으로 추진해 온 사업의 결과물이다. 보고서는 지난 2년간 국제미래교육위원회의 고위급 위원들의 논의와 더불어 전 세계 시민 100만 명 이상의 참여를 통해 작성됐다.
창설 이후 75년간 세계 각지에서 문해 캠페인을 진행하고 교사 훈련을 돕는 등의 활동을 펼쳐 온 유네스코는 교육 현장에 대한 지원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이 보다 효과적이며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교육시스템의 전환을 이뤄 모두를 위한 평생학습의 기반을 마련토록 주요 의제와 로드맵을 제시하는 데도 큰 공을 들여 왔다. 오늘날의 평생학습 개념을 떠받치는 기둥으로 평가받는 1972년의 『존재하기 위한 학습: 교육계의 오늘과 내일』(Learning to Be: the World of Education Today and Tomorrow, 일명 ‘포르 보고서’)과 1996년의 『학습, 그 안에 숨겨진 보물』(Learning: the Treasure Within, 일명 ‘들로르 보고서’)은 그 대표적인 결과물로, 포르 보고서는 평생교육의 이유와 목적을 제시하고 들로르 보고서는 그 지평을 시대에 맞게 더욱 확대·심화시킨 바 있다.
유네스코는 세계 각국이 교육 시스템 내의 불공정 요소를 개선하고 학습자들에게 지속가능하고 정의로운 미래를 만들어 갈 역량을 길러주기 위해 대전환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번 보고서가 전 세계적 논의를 이끌어내 궁극적으로 학부모와 학생, 그리고 교육계 사이에 새로운 사회적 계약을 맺도록 할 촉매제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유엔 역시 이번 보고서 발간 소식을 전하며 “유네스코는 2050년까지 교육계가 무엇을 버리고, 이어나가며, 새로 개발해야 하는가라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도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더 공정하고 윤리적인 과학 발전을 위해
총회 폐회를 하루 앞둔 11월 23일에는 미래 인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과학기술의 연구와 적용, 보급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중요한 기준이 될 두 건의 유네스코 권고인 ‘AI윤리 권고’(Recommendation on the Ethics of Artificial Intelligence)와 ‘오픈 사이언스 권고’(Recommendation on Open Science)가 채택됐다. 2019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권고 준비가 결정된 이후 지난 2년간 관련 분야 전문가 그룹과 각 회원국들의 논의 끝에 마련된 두 권고는 각각 인공지능 개발 및 도입 과정에서 적용돼야 할 윤리적인 기준을 마련하고, 오늘날 과학계에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개방과 공유의 과제를 얼마나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AI윤리 권고 채택은 인공지능의 연구개발과 그것의 활용 과정 전반에 적용돼야 할 전 세계적 윤리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오늘날 교육과 행정, 네트워크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며 수십억 명의 사람들의 생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AI는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오·남용으로 인한 인권침해나 불평등 심화 등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하지만 세계과학기술윤리위원회(COMEST)가 사전 연구를 통해 밝혔듯, 현재까지 AI의 개발과 적용 과정에 윤리적이며 인간중심적인 접근법을 강조하는 전 세계적 기제는 마련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에 유네스코 회원국들은 AI가 인류의 보편적 이익을 위해 쓰이도록 하는 한편, 그 스스로 인간 중심적이며 윤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이 연구·개발·적용의 모든 과정에 포함돼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이번 권고안에 담았다.
AI윤리 권고와 함께 채택된 오픈 사이언스 권고는 과학 연구 및 그 결과물에 대한 보편적 접근을 가능케 하는 ‘오픈 액세스’(Open Access), 과학 데이터의 폭넓은 접근과 활용을 뜻하는 ‘오픈 데이터’(Open Data), 그리고 그 전 과정에 시민사회의 폭넓은 참여를 보장하는 것(Open to Society)을 주요 골자로 하는 오픈 사이언스에 대한 원칙과 가치를 정립해 놓은 권고다. 인류는 과학계가 기존의 폐쇄성을 버리고 협력과 공유를 택할 때 인류 전체에 돌아갈 수 있는 혜택이 더욱 커진다는 사실을 지난번 코로나19의 백신과 치료제 개발 과정을 통해 실감하고 있다. 전문가들 역시 지금 인류 앞에 기후위기와 지속가능발전 등 특정 국가의 힘이 아닌 전 인류의 공통된 노력이 필요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음을 감안할 때, 오픈 사이언스가 보다 투명하고 효율적이며 역동적인 과학 발전을 이룩하는 데 큰 동력을 부여해 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유네스코 회원국들은 이러한 견해에 뜻을 같이하고 과학 분야를 활동 영역으로 두고 있는 유네스코의 권고에 그 원칙을 담아냄으로써 앞으로 과학계에서 오픈 사이언스가 더욱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했다. 이번에 채택된 이 두 권고들은 앞으로 회원국들이 해당 의제를 자국의 체계에 도입할 때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게 될 것이며, 유네스코도 이보다 앞서 채택된 ‘인간 게놈과 인권에 관한 보편선언’(1997년), ‘생명윤리와 인권에 관한 보편선언’(2005년) 등과 마찬가지로 이번 권고들이 과학 분야의 발전을 더욱 인간적이고 윤리적이며 포용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평화와 공존의 종착지를 향해
지난 2년간 지구 곳곳의 일상적인 활동들을 멈춰 세웠던 코로나19 팬데믹 앞에서 유네스코 역시 활동에 적잖은 제약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유네스코 본부를 비롯해 세계 곳곳의 현장을 채웠던 지적 교류와 상호 이해를 구하는 목소리들은 온라인으로 제한적으로 전달돼야 했고, 교육·과학·문화·정보커뮤니케이션 영역의 수많은 연구 및 현장 사업들도 일정에 크고작은 차질을 빚었다. 그래서 비록 각자 마스크를 쓴 채이기는 해도 이번 총회에서 회원국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예정된 일정을 소화하고, 예년처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이를 하나된 목소리로 모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이제 유네스코도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가 됐다는 뜻이기도 할 터다.
그렇게 보름 동안 다음 4년을 기약하는 리더를 뽑고 과학계에 인간적인 온기를 불어넣어 줄 권고를 마련하고 교육계의 미래지향적 전환을 이루기 위한 보고서를 내놓은 유네스코는 이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더 포용적이며 평화롭게 만들어 나갈 또다른 모험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총회 기간 동안 열린 전시 ‘The UNESCO Adventure’(유네스코의 모험)의 한 사진 설명에 쓰여있듯,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다시 이어나갈 유네스코의 모험 역시 지난 75년의 여정과 그 종착지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식의 교환과 전파를 가능케 해줄 연결고리를 사람들 사이에 만들어”, “전쟁과 폭력의 위협을 영원히 없앨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빚어내는 일이다.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