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국립도서관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전시
연중 수많은 전시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 파리에서는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임을 자부하는 도시답게 한국 관련 작품이나 유산을 접할 기회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파리에서 접한 우리나라의 유산은 정말 특별합니다. 바로 50년 만에 ‘직지’ 원본이 일반 대중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3월부터 부임해 앞으로 매달 독자들께 흥미로운 본부 소식을 전할 홍보강 주재관이 그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안녕하세요? 3월부터 주유네스코대한민국대표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홍보강 주재관입니다. 저는 자연과학 분야를 주로 담당하고, 커뮤니케이션 분야 업무도 일부 맡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면을 통해 여러분께 인사드리게 돼서 반갑습니다. 앞으로 파견근무를 하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앞에서 커뮤니케이션 일부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번 호에서는 제 담당 업무는 아니지만 얼마전 다녀온 흥미로운 전시회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파리에서 열린 직지 원본 전시회인데요. 이미 뉴스를 통해서 그 소식을 접한 분도 꽤 계실 것 같습니다.
직지 원본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두 번째는 1972년 ‘세계 도서의 해’ 전시에서였습니다. 이후 자료의 보존과 보호를 위해 일반인에게 거의 공개되지 않다가 이번에 50년 만에 공개가 된 것이죠. 큰 기대를 안고 전시장인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이번 전시회의 제목은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Imprimer! L’Europe de Gutenberg)’입니다. 처음에는 다소 의아하게 여겨졌던 제목은 전시를 관람하면서 어느정도 납득이 됐습니다. 전시장에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구텐베르크 이전 아시아와 유럽의 인쇄’라는 섹션에서 직지 원본이 관람객을 맞이합니다. 구텐베르크 성경이 인쇄되기 78년 전 이미 금속 활자로 인쇄를 한 한국의 직지를 함께 전시함으로써 관람객들이 활판 인쇄에 관한 종합적인 이해를 할 수 있게 해줍니다.
유리상자 안에 있는 직지 원본은 마치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를 처음 봤을 때처럼 제 기대보다는 작게 느껴졌습니다. 전시된 유럽의 다른 책들과 비교하면 그 크기가 더욱 작습니다. 그럼에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이 작고도 소중한 직지 원본을 기록에 남기고 싶은 마음에 저뿐만 아니라 주변 관람객 모두 사진을 찍느라 바빴습니다.
사진을 몇 장 찍고 흥분된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나니 그제서야 훌륭한 보관 상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된, 600년이 훌쩍 넘은 인쇄물이라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종이는 깨끗했고 글자는 선명했습니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의 보존 및 관리도 훌륭했지만 직지가 인쇄된 한지의 질이 우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네요. 프랑스국립도서관 직원은 직지 원본에 대한 연구 결과를 설명하면서 일부 글자는 인쇄가 잘 되지 않아 붓으로 다시 쓴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직지 원본을 봤다는 만족감을 안고 나머지 전시도 살펴봤습니다. 이번 전시는 직지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 판화인 ‘프로타 판목’(프랑스 또는 독일 남부, 1400년 경)과 유럽 최초 활판 인쇄물인 ‘구텐베르크 성경’(독일, 1455년경) 등 여러 희귀한 장서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름만 알고 읽어보지 못한 유럽의 고전들을 보니 독서 욕구가 새삼 샘솟았는데, 제발 이번에는 실천으로도 이어지길 기대해 봅니다.
전시회를 함께 관람한 한국 조계종의 범종 스님은 직지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이고 유네스코 기록유산이라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들은 많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직지가 고려 때 스님이 만든 책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던 저도 속으로 뜨끔했습니다. 그래서 며칠 후에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범종 스님의 강연회에도 다녀왔습니다.
목요일 저녁, 서둘러 퇴근해서 강연 시작 전에 한국문화원에 도착했습니다. 빈 자리가 거의 없는 강연장에서 범종 스님은 쉽고도 재밌게 직지의 내용을 설명해 주셨지만, 선불교의 심오한 내용을 제가 제대로 정리할 자신이 없네요. 다만 직지가 ‘참선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책’이라는 걸 안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큰 수확이었습니다. 스님이 직지의 일부분을 법회에서 하는 방식으로 낭독해 주셨을 때는 직지가 단지 기록물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텍스트라는 점을 느낄 수 있어 더 좋았습니다. 청중들의 질문도 흥미로웠습니다. 하권만 남아 전해지는 직지 금속활자 인쇄본의 상권을 찾는 시도가 있었는지 묻는 질문에 ‘어쩌면 세계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의미심장하게 들린 건 저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직지 원본을 만날 수 있는 전시는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7월 16일까지 계속되니 혹시 이 기간에 파리에 오실 분은 한번 들러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학생 할인도 적용되니 잊지 말고 활용하시고요. 한편, 직지의 목판본은 한국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고 청주고인쇄박물관에도 직지와 관련된 다양한 전시가 있다고 하니, 한국에 돌아가면 저도 꼭 가보고 싶네요.
홍보강 주유네스코대한민국대표부 주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