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비가 많이 오던 날, 또는 무더웠던 여름날의 소중한 추억 하나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즐겁게 뛰어놀던 추억, 뜨거운 햇살 아래 땀을 흠뻑 흘린 후 시원한 그늘에서 휴식하던 추억 같은 것들 말이지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의 여름은 극한의 폭우와 기록적인 더위로 얼룩진 ‘아픈’ 계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름뿐만 아니라 사계절 내내 가뭄과 산불 피해 역시 반복되고 있기도 하죠. 그리고 그 배경에 공통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바로 기후변화입니다. 오늘은 대륙 반대편의 파리에서 또 다른 모습의 여름을 맞고 있는 주재관으로부터 기후변화의 중요한 변수인 ‘물’과 관련한 유네스코의 과학협력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기후변화와 관련해 더욱 주목받는 유네스코의 물 분야 국제협력
모두가 알다시피 기후변화는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 중 하나입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인식 변화와 그에 따른 일상에서의 실천, 정부와 민간 기업의 의지와 협력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유네스코와 같은 국제기구를 통한 국제 과학협력입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폭염, 폭우, 가뭄, 홍수 등 극한의 기상이변이 전 세계적으로 더욱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학을 통해 체계적이고 현실적인 대응 방안을 찾아가고자 하는 국제기구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국제 과학협력 분야 중에서도 ‘물’은 기후변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핵심 협력 분야입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극한 기후 현상이 주로 물을 통해 나타나기도 하고, 해양과 연안 생태계가 탄소를 포집하고 저장하는 블루카본(Blue Carbon)의 역할이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유효한 방안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네스코는 일찍부터 물 분야 국제협력을 주도해 왔습니다. 유네스코의 대표적인 물 분야 활동으로 우선 ‘정부간수문학프로그램(Intergovernmental Hydrological Programme, IHP)’을 꼽을 수 있습니다. 유네스코는 물과학 발전과 지속가능한 수자원 관리를 위해 1975년에 IHP를 설립했습니다. IHP는 유엔 체제 내 유일한 물 분야 정부간기구로서 ▲깨끗한 식수 확보 ▲홍수 예방 ▲빙하 보존 ▲수질 개선 등을 위해 전 세계 과학자와 정책결정자의 협력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의 물 분야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유네스코는 ‘정부간해양학위원회(Intergovernmental Oceanographic Commission, IOC)’를 통해 해양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IOC는 해양 및 연안 지역의 특성과 자원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높이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각 회원국의 정책결정, 지속가능한 발전, 해양 환경 보호를 지원하기 위한 국제협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1960년에 유네스코 내 설립된 IOC는 꽤 독특한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IOC는 이른바 ‘기능적 독립성(functional autonomy)’을 보유하기 때문에, 유네스코의 내부 조직이면서도 상당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IOC는 자체 회원국을 보유합니다. 유네스코의 회원국은 194개국이지만 IOC는 152개국이 회원국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두 번이나 유네스코를 탈퇴했을 때도 IOC에는 회원국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IOC의 기능적 독립성 덕분이었습니다. 내년 12월 31일에 공식적으로 발효될 세 번째 유네스코 탈퇴 이후에도 미국은 IOC에 남아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기구 안에서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IOC에는 자체 사무총장(Executive Secretary) 역시 있습니다. 물론 IOC의 사무총장은 유네스코 안에서는 한 명의 사무총장보(Assistant Director-General, ADG)로 간주됩니다. 이처럼 독특한 특성을 지니는 IOC는 그만큼 해양 분야의 전문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유엔 내에서 ‘2021-2030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해양과학 10년’의 조정을 전담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의 물 분야 활동은 수자원 관리에서부터 해양과학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며, 고도로 전문적입니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유네스코 물 분야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의미 있는 기여를 하는 선도적인 회원국으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한국은 2002년부터 IHP 이사국으로 선임되어 활동해 왔고, 아태지역 의장국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6월 12일에 유네스코 본부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IHP 50주년 및 물 과학 6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국은 ‘물 과학과 협력 50년 그리고 그 이후’를 주제로 한 부대행사도 성공적으로 개최했고, 환경부 주최로 전체 리셉션도 열어 IHP 분야에서 한국의 선도적 입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한편, 지난 제33차 IOC 총회(6.25.~7.3.)에서는 한국의 박한산 박사(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한-인도네시아 해양과학공동연구센터장)가 아시아태평양지역 그룹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요. 한국이 그간 아시아 지역의 블루카본, 해양위성 등의 분야에서 공동연구와 국제협력을 펼치며 사무국과 회원국들로부터 쌓아온 신뢰가 선거 과정에서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유네스코는 분쟁이나 재난이 발생한 이후에 긴급 대응을 하기보다는 사전 예방을 위해 더욱 노력하는 유엔 전문기구입니다. 물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장기적인 안목과 호흡으로 인류의 생존에 필수적인 수자원과 해양의 지속가능한 관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유네스코의 여정을 함께 하는 핵심적인 회원국이기에, 물 분야는 한국의 관련 전공자와 전문가가 기여할 여지가 높은 전략 협력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유연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물질인 물. 이러한 물을 다루는 유네스코의 여정에 더 많은 한국인이 동참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파리통신 더보기ㅣ수백만 명을 쓰나미 위협으로부터 지키는 유네스코의 조기경보시스템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원이지만 때로는 가장 무서운 재난의 원인으로도 돌변할 수 있는 물. 그러한 물의 압도적인 위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재난 중 하나가 바로 쓰나미일 텐데요. 유네스코의 물과 해양 분야 국제협력 사업 중 하나인 ‘쓰나미 조기경보체계’는 해안 지역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쓰나미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고 있습니다. 2004년 인도양에서 발생한 쓰나미로 무려 22만 명이 목숨을 잃은 뒤 본격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한 이 시스템은 유네스코의 과학적 전문성과 회원국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국제 조정 능력, 그리고 지역 당국의 적극적 협조가 결합된 경보 체계로 자리잡았는데요. 지난 7월 30일에 러시아 캄차카 반도에서 강력한 해저지진(규모 8.8)이 발생했을 때도 지진 발생 10분 만에 고위험 지역에 초기 경보를 발령하는 등 빠르고 정확하게 작동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는 쓰나미 경보 발령과 신속한 주민 대피뿐만 아니라 평시에 이러한 재난에 대비하고 비상 발생 시 대응력을 높일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는데요. 전 세계 43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Tsunami Ready(쓰나미 대비)’ 프로그램은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대피 계획 수립, 정보 캠페인, 지역 경보시스템 구축 등의 교육과 훈련을 시행함으로써 해안 지역 주민들의 지속가능하고 안전한 삶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백영연 주유네스코대한민국대표부 주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