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대 이스라엘, 이란 대 이스라엘, 그리고 우크라이나 대 러시아. 세계 곳곳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분쟁과 전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네스코를 포함한 모든 유엔기구들이 ‘평화’를 내세우며 활동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지요. 그래서 국제기구를 통한 평화 유지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실제로 분쟁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전쟁을 수행하는 당사국이나 초강대국의 의지인 경우도 많죠. 하지만 단지 이런 현실을 이유로 들어 어떤 상황에서든 평화를 이야기하는 국제기구들의 노력을 소용없는 일로 단정할 수 있을까요? 평화와 평화 구축을 위한 노력을 대하는 유네스코의 자세를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본 파리 주재관의 이번 소식을 읽고 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노르웨이의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평화의 개념을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와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로 구별했습니다. 소극적 평화는 무력 충돌이나 전쟁과 같은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고, 적극적 평화는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폭력마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평화라는 단어 안에 좀 더 다양한 갈래가 있는 것이지요. 국제기구들 역시 각 기구마다의 고유한 임무에 따라 추구하는 평화의 개념이 다릅니다.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 간 무력 분쟁 상황을 긴급하게 다루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UN Security Council)는 소극적 평화를 추구하는 핵심 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유네스코는 유엔 체제 안에서 대표적으로 ‘적극적 평화’를 추구하는 전문기구입니다.
이렇듯 유엔기구들은 유엔 체제 안에서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습니다. 당장 급한 불을 끄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불이 더 번지지 않도록 하고, 다시는 불이 나지 않는 안전한 토대를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유네스코는 당장의 분쟁을 종식하는 데 직접적으로 역할을 하기보다는 분쟁 이후의 사회를 재건하고,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분쟁이 재발하지 않도록 “인간의 마음 속에 평화의 방벽을 세우는 일”(유네스코 헌장 서문 내용)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교육, 과학, 문화, 정보‧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합니다.
평화를 향한 유네스코의 이러한 고유한 접근 방식은 우리나라의 사례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1950년 6월 14일 유네스코에 55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고 그로부터 11일 후인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 제6차 유네스코 총회는 한국의 교육 재건을 위한 긴급 원조를 발 빠르게 결정했습니다. 이후 1954년 유네스코는 유엔한국재건단(UNKRA)과 함께 서울 영등포에 국정교과서 인쇄 공장 건립을 지원하는 등 한국의 교육 재건을 위해 애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전쟁 이후 한반도의 적극적 평화를 위한 주춧돌을 놓아준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2025년, 오늘날에도 유네스코는 변함없이 전 세계에서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폭력마저 없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분쟁이 불붙은 지역에서 유네스코의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유네스코는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등에서 각 분야별 피해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국제사회의 지원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학교, 교사와 학생, 과학자와 과학연구시설, 문화유산, 언론인들이야말로 분쟁 종식을 넘어 항구적인 평화를 만들기 위한 씨앗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는 세계시민교육(GCED), 폭력적 극단주의 방지교육(PVE-E) 등 평화와 공생의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교육 활동을 주도하면서 긴 호흡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평화의 방벽”을 세우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소극적 평화의 효과는 금방 눈에 띕니다.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은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당장의 안도감을 주지요. 반면에 적극적 평화의 효과는 쉽게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고, 그것이 달성되는 호흡 역시 매우 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 평화를 추구하며 유네스코가 수행하는 다양한 활동의 실효성을 보다 긴 호흡으로 관찰하고 평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추상적으로 보이고, 당장 시급한 일들과 동떨어져 보이기도 하는 유네스코의 활동에 공감하는 마음이 늘어날 때마다 ‘인간의 마음 속 평화의 방벽’은 조금씩 더 높아지고 튼튼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디지만 단단하게 평화의 주춧돌을 놓아가는 유네스코의 여정에, 더 많은 사람이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백영연 주유네스코대한민국대표부 주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