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는 미국발 폭풍 주의보! 트럼프 행정부가 다시 백악관으로 돌아온 이후, 많은 사람들의 예상 대로 미국은 경제적·정치적 측면에서 국제사회에 어마어마한 난기류를 일으키고 있어요. 작년에 다시 유네스코 무대로 돌아온 미국을 두 손 들어 환영했던 유네스코 사무국과 여러 회원국 역시 크고 작은 회의 현장에서 미국의 행보를 주시할 수밖에 없는데요. 그런 가운데 지난 4월 2일부터 17일까지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는 제221차 집행이사회가 열렸어요. 이번 회의는 11월에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열릴 제43차 유네스코 총회를 앞두고 유네스코의 향후 활동 방향과 예산을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였어요. 보름에 걸친 긴 회의 기간 동안 현장에 있었던 백영연 주재관은 “변화의 길목에서 크고 작은 변화를 목격했다”는 말로 이번 회의를 요약했는데요. 지속가능발전목표를 거부하겠다는 미국의 입장, 그리고 드디어 유네스코에도 전자투표가 도입됐다는 소식 등, 주재관이 목격한 새로운 변화가 어떤 것들이었는지 함께 살펴보아요.
변화의 길목에서 본 크고 작은 변화들
지난 4월 2일부터 17일까지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 제221차 집행이사회는 올 11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개최될 제43차 총회에서 결정할 주요 사안을 협의하는 자리였습니다. 유네스코의 6개 지역별 그룹에서 뽑힌 58개 집행이사국으로 구성되는 집행이사회는 매년 두 차례 열리는데요(참고로, 총회가 개최되는 해에는 총회 후에 집행이사회 의장단을 선출하기 위해 한 번 더 회의가 열려 집행이사회가 연 3회 개최됩니다). 한국은 2007년 이후 5회 연속 집행이사국으로 당선되면서 유네스코에서의 활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번 회의에서 각국 대표들은 유네스코의 다음 사무총장 후보를 인터뷰하고, 2026년부터 2029년까지 향후 4년간 기구가 주력할 활동 방향과 관련 예산안(43 C/5)을 치열하게 협의했습니다. 특히 이번 집행이사회 회의에서는 기존과는 다른 크고 작은 변화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미국의 입장 변화가 유네스코의 미래에 미칠 영향은?
이번 집행이사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는 유네스코 활동에 대한 미국의 공식 입장이었습니다. 지난 4월 7일, 미국 수석 대표는 발언을 통해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2월 행정명령을 통해 약 90일(5월 초까지) 동안 유네스코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지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고, 이와 관련한 미국의 몇 가지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중 ‘반유대주의적 활동 반대’와 ‘보수적인 예산 편성 원칙’ 등은 그동안 미국이 유지해 오던 기조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입장을 밝혔는데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가 연성적 글로벌 거버넌스(soft global governance)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개별 국가의 주권 원칙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SDGs와 2030 의제를 거부(the United States rejects the 2030 Agenda for Sustainable Development and the SDGs)”하고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또는 생물학적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젠더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프로그램이 차별 철폐를 위한 노력을 저해한다고 평가하며 ▲과도한 UN 기념일 제정에 반대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물론, 발언문 전문을 살펴보면 미국이 앞서 언급한 글로벌 목표와 다양한 가치 및 취지에 기본적으로 공감한다는 전제하에 자국의 입장을 피력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이번 입장은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수석대표 발언을 통해 제시한 국가 입장에 따라 여러 관련 안건들에 반대를 표했고, 해당 안건별 결정문을 건건이 투표를 통해 채택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유네스코 투표도 이젠 디지털 시대
그래서인지 제221차 집행이사회는 유난히 투표가 많이 이루어진 회의라고도 기억됩니다. 집행이사회 투표는 회원국이 자국의 명패를 세워 찬성·반대·기권 등의 의사를 표시하는 거수투표(show of hands), 회원국의 영문명을 알파벳 순서로 호명하면서 한 회원국씩 의사를 묻는 호명투표(roll-call), 그리고 예외적인 사안에 대해 진행되는 비밀투표(secret ballot) 방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세 가지 투표 방식은 모두 명패를 이용하거나, 각 회원국 대표가 육성으로 의사를 표시하는 등의 ‘아날로그’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집행이사회에서는 최초로 디지털 투표 방식을 도입하면서 이사국들의 의사를 좀 더 빨리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국이 투표에 부친 결정문 전체를 채택하는 데 동의할 경우 녹색 버튼을, 반대할 경우 빨간 버튼을, 기권할 경우 가운데 파란 버튼을 누르는 방식이었습니다. 회의장에서의 투표뿐만이 아니라 그간 유네스코의 의사결정 방식은 아날로그적인 측면이 적지 않았는데, 드디어 유네스코 본부에도 디지털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인지 기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정부간 다자기구인 유네스코는 인류 공동의 글로벌 도전과제에 대응하는 한편, 기구 내 다양한 회원국 간 이해관계를 합의를 통해 조정해 나가야 하는 이중과제에 늘 직면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회원국들의 의견을 고루 수렴하고 치열한 토론을 거쳐 합의를 이루어 내는 일은 앞으로도 쉽지는 않을 텐데요. 부디 유네스코가 녹록치 않은 현실 속에서도 ‘인류의 지적·도덕적 연대’라는 근본 가치를 놓치지 않은 채 ‘효율’이라는 토끼까지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백영연 주유네스코대한민국대표부 주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