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유네스코 세계유산 해석 국제회의
2016년부터 매년 5월에 세계유산위원회 개최에 앞서 서울에서 열려 온 유네스코 세계유산 해석 국제회의는 유산 해석의 개념과 중요성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유산 분야 전문가, 세계유산위원국 및 유네스코 회원국 대사, 관계자와 일반인 등 2-30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연례회의다. 코로나19로 인해 2020년에 예정됐던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가 올 6월로 연기된 가운데,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지난해 11월 24일에 온라인 콘퍼런스로 해석회의를 개최했다.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가 2021년 6월로 연기된 마당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해석 국제회의(이하 해석회의) 역시 한 해쯤 쉬어가도 이상할 것은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국내외에서 유산 해석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이 조금씩 높아지는 이때를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이에 온라인으로나마 우리 모두의 유산과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올해에도 이어 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비대면 국제회의가 특별히 어려울 것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은 담당자의 오산이었다. 제 각각의 시간대에 살고 있는 연사들의 안정적인 접속 여부를 확인하고, 카메라와 마이크, 발표 자료가 올바르게 작동하는지 점검하고, 중계 시스템과 통역까지 체크했지만 리허설이 아닌 ‘실전’에서는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사회자는 “Life is full of surprises, but it still goes on”(인생은 예상치 못한 사고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계속됩니다)이라 너스레를 떨며 연신 식은땀을 닦아야 했다.
그런 좌충우돌 속에서 시작된 해석회의에서 참가자들은 하나의 유산이 지니는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포용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인권적인 측면에서 세계유산에 접근하려는 중요한 시도’라는 점을 공유하며 관련 논의를 이어갔다. 기조 발제를 맡은 피터 빌 라슨 제네바대 교수는 “세계유산 분야에서 인권에 대한 고려는 이제 필수 요건이 되었으며, 유산에 대한 포용적인 해석으로 나아가기 위해 상충하는 의견과 가치를 조율할 수 있는 기술과 역량을 구축하고, 해석의 과정에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크리스토퍼 영 박사도 “상충하는 여러 의견들 사이에서 균형 잡힌 해석을 내놓기 위해서는 다양한 원칙과 맥락을 고려하고 취할 수 있는 접근법들을 면밀히 살핀 후 화해와 융합으로 나아가기 위한 단계들을 순차적으로 실행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마리루이스 소렌젠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만인의 공공재’로서의 유산과 ‘특정 공동체가 배타적인 권리를 지니는 대상’으로서의 유산이 서로 공존하고 조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유산의 해석을 통해 ‘모든’ 목소리를 포용하고자 하는 시도의 한계점 역시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경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좌장을 맡아 진행된 토론에는 세 명의 발제자와 더불어 세계유산위원국인 중국과 과테말라의 주유네스코 대사, 한경구 서울대 교수, 세계기록유산 전문가 로슬린 러셀 박사와 게르하르트 렌츠 람멜스베르크 광산 박물관장이 참여했다. 로슬린 러셀 박사는 호주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포로에 대해 발생했던 비극적인 사건과 그 이후 호주-일본 간의 화해 과정, 그리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지역사회의 노력을 예로 들며 “유산의 해석이라는 것은 지역 공동체의 참여가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고 강조했다. 한경구 서울대 교수는 유산 해석의 중요성, 시의적절성과 필요성에 깊이 공감하는 한편, 그 실현 가능성과 방안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세계유산협약 과정에서 유산 해석을 적용할 때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원칙 일곱 가지를 제안하기도 했다.
라슨 교수는 “우리는 알고 있고,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Yes we know, yes we can, yes we must)는 세 가지의 ‘YES’로 전체 세션을 요약했다. 세계유산과 유산의 해석을 논할 때 인권에 대한 고려가 얼마나, 왜 필요한 것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며, 포용적인 해석과 그것을 통한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고,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전진해야 한다는 뜻이다. 라슨 교수는 이와 함께 올해 해석회의에서 논의된 이야기가 행동으로도 옮겨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는 말로 회의를 마쳤다.
담당자에게는 마치 사흘, 아니 석 달 같았던 3시간 동안의 회의는 우여곡절 끝에 뜻깊은 결론으로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음성통화로 회의에 참여하며 “아마도 생에 가장 길고 즐거운 통화였던 것 같다”는 말로 담당자를 위로했던 크리스토퍼 영 박사, 통역의 혼선을 막고자 준비했던 한국어가 아니라 즉흥적인 영어로 토론에 참여한 한경구 교수, 매끄러운 진행과 정리로 현장의 혼란을 감쪽같이 수습한 좌장 서경호 교수까지, 혼란과 사고 속에서도 함께한 연사들의 기지와 배려가 이번 해석회의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비대면 국제회의도, 포용적 유산 해석도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부디 내년에도 세계유산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우리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 주시길 기대한다.
손다희 문화팀 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