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관 서신
유네스코의 탄생은 1922년 설립된 국제지적협력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on Intellectual Cooperation, CICI)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인류의 지성들이 모여 국제연맹을 자문할 목적으로 만든 이 위원회는 프랑스의 대표적 철학가 앙리 베르그송이 의장을 맡았고, 알버트 아인슈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 마리 퀴리, 토마스 만 등이 참여했다. 세계적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1950년 인종선언(Statement on Race)을 준비하면서 맺은 유네스코와의 인연을 50년 넘게 이어 갔으며, 유네스코의 기본 이념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유네스코의 『세계 사회과학 보고서』는 100여 명의 전문가가 합작해 내놓은 결과물이고, 『아프리카 통사』는 230명, 『남아메리카 통사』는 240명의 역사학자가 함께 만들어낸 집단지성의 작품이다.
‘실패하지 않는 평화는 인류의 지적, 도덕적 연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유네스코 헌장」에서 밝혔듯, 유네스코에 있어 지식인과 전문가들은 핵심 그룹이자 가장 든든한 조력자다. 유네스코가 다루는 수많은 주제에 바른 좌표를 제시하고, 전 세계 정부와 시민, 학계에 영향력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기 위해 유네스코와 전문가 그룹의 공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문성의 위기, 신뢰성의 위기
그런데 지난 7월, 바레인에서 열린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전문가 그룹의 평가 의견을 뒤엎는 일이 또다시 벌어졌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n Monuments and Sites, ICOMOS)가 2년여의 검토 과정을 거쳐 등재가 불가하다고 평가한 사우디아라비아와 독일의 유산이 위원국들의 결속된 행동 앞에 등재 결정된 것이다. 이처럼 회원국들이 단결해 전문가 그룹의 의견을 무시하는 판결을 내는 일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이번 세계유산은 31건 중 12건 에서, 지난번 무형유산은 35건 중 10건에서 전문가 그룹의 평가가 뒤집혔다. 이에 유네스코의 신뢰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한편, 유네스코의 대표 사업 중 하나로서 물과학 분야를 다루는 수문학프로그램(International Hydrological Programme, IHP)에서는 43년간 유지해온 이름 앞에 놓인 ‘국제’(international)라는 단어를 ‘정부 간’(intergovernmental)으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국제사회의 주요 이슈로 떠오른 물 문제에 각국의 관심과 지원을 더 끌어내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지만, 한편에서는 전문가들의 참여 폭이 더 줄고 정부 중심으로 위원회의 방향이 기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전문성이 곧 경쟁력이다
이처럼 최근 유네스코에서는 국가, 즉 정부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하지만 국제기구의 활동 분야란 결국 각국의 이해가 걸려있는 분야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활동에서 전문가의 균형 있는 시각과 조언은 더없이 중요하다. 전문성이 빠진 자리에 정치가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더 그렇다.
오드리 아줄레 사무총장이 취임 이후 내놓은 유네스코의 개혁 방안에는 과거에 없었던 신선한 방식이 들어있다. 명망 있는 지식인들로 구성된 고위급 숙려그룹(High Level Reflection Group)에게 유네스코가 나아가야 할 길을 묻겠다는 것이다. 12명의 세계적 전문가로 꾸려질 숙려그룹은 9월부터 가동되어 사무총장의 개혁 방향을 자문한다. 이는 ‘정부 간 기구’를 유독 강조해 오던 최근의 흐름에 맞서, 유네스코가 더는 정치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사실 정부적 성격과 전문성은 서로 대척점에 있지 않다. 정부가 대표가 되는 전문위원회의 활동은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빛을 발할 수 있고 유네스코의 모든 사업에는 역량 있는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따라서 회원국이 유네스코 내에서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길은 다름 아닌 자국의 이름으로 활약하는 전문가들을 키워내는 일이다. 유네스코 역시 전문성을 존중하는 문화를 제대로 세울 때 유네스코의 신뢰성과 권위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이선경 주유네스코 대한민국대표부 주재관
*주유네스코 대한민국대표부 주재관은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서 파견하며, 외교업무수행, 유네스코와 대표부와 한국위원회 간의 연락, 유네스코 활동의 조사, 연구, 정책개발 등을 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