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도광산 현장답사
일본이 2015년에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약속한 ‘강제노역 관련 사실을 알리는 조치’는 아직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강제노역이 있었던 또 다른 장소인 ‘사도섬의 금산’(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 하고 있다. 세계유산 등재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 사이의 긴장이 다시 높아지는 가운데, 사도광산이 품고 있는 ‘전체 역사’를 둘러보기 위해 그 현장을 찾아 보았다.
우리 일행은 인천에서 출발해 도쿄와 니가타를 거쳐 꼬박 하루가 걸려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의 료쓰항에 도착했다. 사도섬의 관문인 이 항구에 내리자마자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라고 강조된 포스터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2022년 2월 1일, 일본은 이곳에 있는 ‘사도섬의 금산’(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를 세계유산센터에 제출했다. 지난 2015년 우여곡절 끝에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지 7년여 만이다. 당시 일본은 해당 유산의 일부 시설에서 강제노역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알리기 위한 조치를 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으며 ‘전체 역사를 반영해야 한다’는 한국 및 여러 회원국의 주장을 받아들였지만, 그 약속은 현재까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에 2021년 열린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례적으로 강한 유감을 표명하며 일본이 등재 당시 약속했던 조치 등을 온전히 이행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조선인들의 강제노역이 있었던 장소인 사도광산의 등재를 신청한 일본 정부는 앞선 유산 등재 과정에서의 논란을 의식해서인지 이번에는 다른 접근법을 들고 나왔다. 1467년부터 1989년 폐광되기까지의 전체 사도광산의 역사 중에서 에도시대(1603-1867년)의 전통적인 수공업 방식의 금 생산 체제 부분만을 등재 추진함으로써 조선인 강제동원이 이루어졌던 시기를 평가 대상 기간에서 제외한 것이다.
8월 말 현재 사도광산에서 관광객이 관람할 수 있는 곳은 소다유(宗太夫)갱과 도유(道遊)갱으로, 두 갱은 같은 입구로 입장 후 왼쪽(도유갱)과 오른쪽(소다유갱)으로 갈라진다. 소다유갱은 에도시대 초기에 손으로 파 내려간 갱도였으며, 1899년에 개발이 시작된 도유갱은 광산의 근대화를 보여주는 장소다. 관람객의 동선은 먼저 소다유갱을 관람한 후 다시 도유갱을 관람하도록 되어 있었다. 소다유갱은 당시 광산의 모습과 작업 내용을 인형 모형 등을 통해서 실감 나게 보여주며, 전반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 광산 노동자들의 고초를 조명한다. 무숙인(노숙자)을 동원한 내용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갱도가 깊어질수록 갱 내 물을 밖으로 퍼 내야 했는데, 일손이 부족해 1778년(에도 후기)부터 약 90년간 에도나 오사카, 나가사키의 무숙인들을 사도광산으로 보내 배수인부로서 일하게 했다는 설명이 있었다.
근대에 형성된 도유갱에는 소다유갱과 같이 인형으로 된 재현물은 없었으나, 광산의 근대화와 관련된 패널 전시물과 광차, 레일 등이 남아 있었다. 또한 ▲도유의 와리토(割戸, 파낸 흔적) ▲다카토 수갱 ▲다카토 갱 ▲기계 공장 ▲조쇄장(채굴된 광석을 파쇄기로 잘게 부수는 1차 파쇄 시설) 등을 묶어 ‘도유갱 코스’로 운영하고 있었다. 광산의 연대별 발전사를 보여주는 연표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으로 동원되기 시작했다”는 문구가 있었다. 하지만 강제동원이나 노역자들의 비참했던 삶에 대한 서술은 단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광산의 갱도 외에도 노동자들의 숙소에서부터 제련 시설들까지 다양한 유적이 키타가와 지구 등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키타가와 지구의 이들 유산은 일본이 등재 신청한 ‘메이지 시기’ 이후의 것임에도 사도광산 투어프로그램 중 ‘세계유산 투어’ 코스에 포함되어 있었다.
답사를 마치고 사도섬의 푸른 바다와 햇살을 바라보며 바다 건너 낯선 일본땅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생각해 본다. 현대적인 장비와 노동법의 보호도 없었던 시기, 고되고 위험한 탄광 노동의 상당 부분은 강제적인 노동력 동원에 의존해야 했다. 꼭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사례를 찾아보지 않더라도 일본 곳곳에서 끌려와 폐병 등으로 사망한 노숙자와 천주교도 등의 무덤과 공양탑이 지금도 이곳에 남아 있다. 자신들의 산업유산을 조명하기에 앞서, 지금 필요한 것은 사도섬의 전체 역사와 그곳에서 스러져간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좀 더 깊이 고민하며 성찰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가혹한 노동과 학대 속에서 고향 산천을 그리다 죽어간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돌린 채, 관광상품으로서의 매력을 높이기 위해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 한다면 이는 세계유산의 본래 목적에 부합한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평화의 장벽을 쌓는다”는 유네스코의 설립 목적과 이념에 맞는 세계유산협약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면서, 더 깊은 대화와 이해를 위해 서로 한 발짝씩 다가가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장자현 문화커뮤니케이션팀 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