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뜻하지 않은 유탄을 맞았다. 당초 의장국인 러시아의 카잔에서 2022년에 열릴 예정이던 제45차 세계유산위에 대해 회원국 대다수가 참석 거부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러시아가 의장직을 내려놓으면서 부의장국 중 하나인 사우디가 자국 유치 의사를 표명했고,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는 올해 9월 10일부터 25일까지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알 파이살리아 타워에서 열릴 수 있었다. 어렵게 개최된 만큼 기대도 컸던 이번 회의의 이모저모를 독자들께 전한다.
유네스코 문화 분야 업무를 맡으면서 세계유산위원회 개최 과정을 여러 차례 지켜봤지만, 이번처럼 여러모로 준비 과정이 불안했던 경험은 없었다. 보통 세계유산위원회 일정이 확정되면 관련 의제를 다룬 문서들이 60-90일 전부터 공개되는데 이번에는 개최 한 달 전쯤에야 문서가 공개돼 회의 의제 관련 사항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다. 입국 비자가 제때 나오지 않아 애를 먹기도 했으며, 회의 개최장소인 알 파이살리아 타워는 사우디가 자랑하는 랜드마크이지만 숙박비가 지나치게 비싸 각국 대표단 및 관계자들이 외곽 지역 숙소로 몰리면서 그곳의 숙박비
가 폭등하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과 달리 친절하고 밝은 현지인들과 현대화된 리야드 시내의 모습에서는 긍정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문의사항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 회의장소의 방만한 운영, 극심한 교통체증과 불안정한 와이파이 문제 등은 리야드가 2030년 엑스포 개최를 두고 한국의 부산과 경쟁 중인 도시라는 점을 감안할 때 더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번 회의에는 필자와 더불어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한경구 사무총장, 국내 세계유산분야 전문가인 김영재 한국전통문화대 교수(유네스코 석좌)와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이코모스한국위원회 사무총장)가 참석했다. 회의장에 도착한 13일부터 각국이 제출한 이행경과보고서(SOC; 기존 등재 유산의 보존·관리 및 권고사항 이행상황을 담은 보고서)에 대한 검토와 세계유산 자문기구(ICOMOS, ICCROM, IUCN)의 검토 내용 및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 사항이 담긴 결정문 채택 논의가 시작됐다. 다만 200개가 넘는 보고서를 일일이 검토하고 관련 의견을 듣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사무국은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상당히 훼손됐거나 이전 회기에서 제기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일부 건에 대해서만 토의 절차를 거치기로 했다.이에 따라 한국의 조선왕릉(2009년 등재)과 일본의 메이지산업유산(2015년 등재)은 토의 없는 의제로 분류되어 사무국이 제시한 결정문 초안이 그대로 채택됐다. 그간 여러 경로로 관심이 불거졌던 조선왕릉 주변의 아파트 개발로 인한 경관 훼손 문제, 그리고 조선인 강제징용을 비롯한 전체역사 설명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는 일본의 메이지 산업유산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되지 못한 점은 못내아쉬웠다. 토의 없이 채택된 결정문에 따라 한국은 조선왕릉과 관련해 향후 유사한 개발문제로 유산 가치 훼손 논란이 재발하지 않도록 유산영향평가를 법제화하고 지역사회의견을 듣는 상임자문위원회를 설립하고 책임 있는 후속조치 이행을 확인하기 위한 경과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일본의 메이지 산업유산 관련 결정문에는 그동안 일본이 진행한 일련의 이행조치를 인정하되, 한국 등 당사국과 책임있는 대화를 지속하고 유산해석전략을 강화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세계유산위원회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신규 유산 등재 건수도 만만치 않았다. 2022년 회기의 27건, 2023년 회기의 29건 등 50건이 넘는 유산 등재를 한꺼번에 심사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의장과 사무국은 꼭 필요한 안건 외의 발언은 최대한 자제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신규 유산 등재를 축하하는 분위기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한국이 제출한 가야고분군은 12번째 심사 대상으로 17일 오후 세션에서 심사가 진행되었고, 애초 자문기구로부터도 등재권고 판정을 받아둔 터라 별다른 이견이나 수정 없이 무난히 등재가 확정됐다. 그순간 가야고분군이 소재한 지역의 지자체장을 비롯한 한국 대표단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이로써 한국은 2021년에 등재된 서해안의 갯벌에 이어 16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목록에 추가했다.
근래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자주 목격된 바와 마찬가지로 이번 세계유산위원회에서도 자문기구의 유예(refer) 또는 반려(defer)를 권고를 뒤집고 최종적으로 등재 권고 판정이 나는 상황이 속출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세계유산 제도의 목적과 지향점에 반한다는 자문기구 차원의 문제제기와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힘이 빠졌는지 별다른 문제제기 없이 기계적으로 다음 의제로 넘어가기에 바쁜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해도 되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사업은 유네스코 활동의 가시성을 높이고 유산 가치 발굴과 보존 및 활용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을 높여 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역할이 적지 않다. 그러나 유산 등재라는 당장의 결과보다는 자문기구의 전문성을 존중하여 유산으로서의 가치와 적확한 보존관리 방안 등을 찾고 보충하며 연구하는 과정이 세계유산제도의 본질에 더욱 가까운 일일 것이다. 전 인류에 보편적인 탁월한 가치를 갖고 있는 유산을 보전한다는 세계유산의 목적을 상기한다면, 유산을 보유하고 관리해야할 의무를 갖는 각국 역시 단지 국가라는 인식 범주를 넘어 현재와 미래세대 모두에게 보편타당한 유산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하는 작업에 결코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동현 유네스코의제정책센터 선임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