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분야 ODA와 유네스코
당장 빈곤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앞에서 문화유산 보호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저 ‘배부른 소리’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있다. 물론 빈곤 문제 해결을 통해 인간의 기본권을 지키려는 국제사회의 노력과 행동은 계속돼야 마땅하지만, 유네스코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지속가능한 삶의 여정’을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며,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역시 그 정신을 국제사회에서 몸소 실천해 보이고 있다.
1948년 발표된 「세계인권선언」은 제27조에서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공동체의 문화생활에 참여하고, 예술을 향유하며, 과학의 진보와 그 혜택을 공유할 권리를 가진다”고 이야기하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주창했다. 유엔 전문기구 중 유일하게 문화 분야를 다루는 유네스코도 이런 생각을 이어받아 일찍부터 문화유산과 문화다양성의 가치와 의미를 알려 왔다. 1991년에는 ‘문화와 개발을 위한 세계위원회(World Commission for Culture and Development: WCCD)’를 출범시켜 문화와 개발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했으며, 1995년에는 『우리의 창조적 다양성(Our Creative Diversity)』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문화적 맥락과 결별한 개발은 영혼이 없는 성장’이라 강조하기도 했다. 또한 2022년 9월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문화정책회의(MONDIACULT)에서는 ▲회복력 ▲사회적 포용과 결속 ▲환경 보호 ▲지속 가능하고 포용적인 성장을 위한 지속 가능한 개발 ▲평화와 안정 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필수 요소가 바로 문화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가진 문화유산을 지키는 활동에 유네스코가 일찍부터 주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베니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이집트의 누비아 등에서 유산보호사업을 통해 유네스코는 문화유산 보호가 지역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고, 교육·과학·문화의 힘으로 세계평화를 달성하겠다는 유네스코의 이상이 국가의 이익이 최고의 선(善)으로 군림하는 국제외교의 장에서도 유효함을 증명해 왔다.
한국 미술사와 건축사를 통틀어 불후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석굴암 역시 유네스코의 이러한 노력이 투영된 사례 중 하나다. 1960년 당시 한국 정부가 석굴암에서 발생한 원인 모를 누수에 대한 구체적인 보수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유네스코 본부와 국제문화재 보존·복구 연구센터(ICCROM)는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요청으로 석굴암 수리 및 보존을 위해 재정적인 부분과 기술적인 부분 모두에서 도움을 주었고, 덕분에 석굴암은 3년 여의 보수·복원공사 끝에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당시 ICCROM의 조사를 총괄한 헤럴드 J. 플렌더라이스(H.J. Plenderleith) 박사의 말대로 “완전히 원형을 잃어버릴 뻔”했던 석굴암은 이후 1995년 한국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등 한국을 넘어 ‘인류의 보물’로 인정받고 있다.
197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기금이 시작된 이래 작년까지 이 기금을 통해 전 세계 2171곳의 프로젝트가 문화유산 관련 지원을 받았으며, 액수로는 4734만 5476달러에 이른다. 이뿐만 아니라 유네스코는 무형문화유산협약, 문화다양성협약 등 문화 분야 국제협약 별로 조성된 기금을 통해 경제적 어려움과 기후변화·자연재해·전염병 확산 등에 맞서 개발도상국의 지속가능발전을 도모해 왔다. 아울러 지역사회와 국가 간의 문화적 교류와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며 궁극적으로 유네스코가 바라는 국제적인 친선과 평화의 실현에 전력하고 있다.
1996년에 OECD에 가입했고 2009년에는 개발원조위원회(DAC)의 회원국이 된 대한민국 역시 국제개발협력을 중요한 외교정책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라는 슬로건이 이제는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 이런 경험을 가진 나라는 여전히 지구상에 대한민국뿐이다. 그리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그 모든 과정에서 국제개발협력의 중심이었다. 2000년대 이후에도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베트남 ‘후에 황성’의 디지털 복원 사업을 시작으로 ▲북한 고구려 고분군 보존 지원 ▲라오스 공예 디자인 워크숍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 개발 협력 사업 ▲세계기록유산 역량 강화 워크숍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문화 분야의 국제개발협력 사업을 수행해 오고 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단순히 유산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문화 및 언어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지역사회에 활기를 불어넣고,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대화의 기회를 제공하며, 더 나은 세상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문화 분야의 개발협력에 주목한다. 2023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서 한국 정부의 ODA 중점협력국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개발 협력 분야 수요조사에서 아시아태평양 및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은 문화유산을 비롯한 문화 분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그 분야도 ▲자국 유산에 대한 인식 제고 ▲기후변화 ▲지속가능한 관광 분야 정책 개발 ▲문화유산 활용 콘텐츠 개발 노하우 공유 등 다양했다. 석굴암을 비롯한 우리의 유산들이 어려웠던 시절에도 우리가 자긍심을 잃지 않게 해 주고 발전을 도모하게 해 주었듯, 한국 정부와 더불어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앞으로도 개발도상국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활용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것이다.
장자현 국제협력사업실 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