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와 학계,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이것만으로 기후변화를 멈추기에는 역부족이다. 따라서 유네스코는 인류가 파국을 향해 나아가는 흐름을 되돌리고 기후변화의 부정적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화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신적·물리적인 완충지대 역할을 할 수 있는 문화·자연유산의 역할에서부터 공존의 필요성에 대한 사람들의 공감과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 이르기까지,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기 위해 문화가 발휘할 수 있는 놀라운 힘에 우리가 기대를 걸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격의 전기차’와 녹색 성장
지난 1년여간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고통받는 상황에서도 선진국들의 주식 시장은 폭주에 가까운 상승세를 유지해 왔다. 일차적 원인은 코로나19로 촉발된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각국이 쏟아부은 천문학적 규모의 재정에 있지만, 테슬라(Tesla)로 대표되는 전기차 및 ‘녹색성장주’들이 시장 전체의 상승세를 앞장서 이끌어 온 것도 사실이다.
전기차가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시장에 자리를 잡고 있는 배경에는 단시일내에 핵심 성능을 끌어올린 관련 업계의 혁신이 있지만, 정부와 소비자의 적극적인 지원과 선택 역시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들은 전기차를 구입하는 소비자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충전소 설치를 돕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기차 보급을 지원했다. 이는 2015년에 전 세계가 ‘파리협정’을 채택하며 지구 평균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2℃ 혹은 1.5℃ 이하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한 이후, 각국이 주요 탄소배출량 관리 방안 중 하나로 전기차 보급을 지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탄소배출량 관리의 압박을 점점 강하게 받고 있는 정부, 그리고 기후변화와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시민들의 의식이 전기차 보급과 구매라는 상대적으로 손쉬운 대응책의 선택으로 이어진 것이다. 국가는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얻기 쉬운 ‘신성장동력’에 대한 투자와 지원을 통해 탄소배출량 감소와 일자리 창출을 한꺼번에 도모할 수 있고, 소비자는 보조금을 받아 새차를 구입하며 ‘의식 있는 소비자’로서의 만족감도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전기차 및 각종 친환경 산업에서 나타나는 기업-정부-소비자 간의 공조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다양한 기관들이 내놓는 분석 및 예측 모델에 따르면 전기차가 줄일 수 있는 탄소배출량이 인류의 기후변화 대응에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영국의 기후과학 및 에너지 정책 관련 인터넷 매체인 『카본 브리프』(Carbon Brief)는 영국에서 전기차 한 대가 전체 사용기간 동안 배출하는 ㎞당 탄소배출량은 2019년 기준으로 내연기관 자동차의 3분의 1에 불과하며, 앞으로 더 줄어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수치는 차량이 가동될 때 직접 내뿜는 탄소뿐만 아니라 공장에서의 차량 생산 및 차량이 사용하는 연료(혹은 전기)의 생산과 운송 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배출량까지 모두 합산한 수치다. 이것만 보면 테슬라가 홈페이지에 야심차게 써놓은 목표대로 “지속가능한 에너지로의 변화를 앞당기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변화만을 기다려 온 25년
문제는 전기차 보급이 아무리 확대된다 한들, 그것이 이미 위험 수위를 한참 넘긴 전 세계의 탄소배출량에 의미 있는 변곡점을 만들어 내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워싱턴 정가의 영향력 있는 인터넷 뉴스매체인 『악시오스』(Axios)는 이에 대해 “전기차는 분명 친환경적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사용하는 전기도 친환경적이라는 전제하에서만 그렇다”고 지적하며, 특히 중국이나 인도처럼 발전 설비뿐 아니라 기초 산업 시설을 가동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국가들이 근본적인 대안을 찾지 못하는 한 화석연료의 대체재로서 전기가 갖는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다양한 변수를 감안해 2030년이면 전 세계의 전기차가 한 해 약 1억 7700만 톤에서 5억 1400만 톤에 달하는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 예측했지만, 이 눈부신 예측치는 중국 내 기초 산업 시설들이 이미 1년에 33억 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다는 수치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 앞으로 인도와 중국, 아프리카 같은 후발국 국민들의 경제 수준이 높아지며 전기차를 포함한 소비재 및 에너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임을 감안하면(그림1), 이들 국가에서 핵심 부품을 위탁생산하는 선진국 친환경기업들이 강조하는 ‘지속가능한 기업 활동’이라는 말은 더욱 공허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전기차를 비롯한 친환경 소비재 열풍과 기후변화의 관계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전문가들이 경고하는 바는 명확하다. 기업들의 비전과 소비자들의 호응이 소용없는 일이라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아야 하며, 힘들더라도 늦기 전에 더욱 강력한 해결책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다. ‘기후변화를 멈추기 위해 즉각 전 세계 화석 연료 사용을 60% 이상 줄여야 한다’는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의 경고가 나온 지는 무려 25년이 넘었다. 그 당시에도 『뉴욕타임스』는 “경제 성장에 중독된 풍요로운 삶에 대한 열망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지금, 우리는 정반대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지만,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인류는 똑같은 경고와 똑같은 권고, 그리고 똑같은 다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혁신이 아닌 마음의 문제
모든 과학적 분석과 예측모델은 기후변화를 멈추지 않으면 재앙이 찾아올 것이라 경고하고 이를 대부분의 정부가 인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류가 여전히 한 목소리로 보다 강력한 대책 수립에 합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앤드류 호프먼(Andrew J. Hoffman) 미시간대 지속가능발전산업 연구소장은 “기후변화에 관한 논의는 과학이 아니라 가치와 문화,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환경문제 및 기업경영 분야를 아우르는 세계적 전문가로 손꼽히는 호프먼 교수는 온라인 매거진 『비헤이비어럴 사이언티스트』(Behavioral Scientists) 기고문에서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사회구성원 전체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기후변화에 대한 인식이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가치체계 속에 먼저 자리잡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이는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삶의 가치에까지 기후변화가 포함돼야 한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신념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기후변화에 대한 그 어떤 말도 완전한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과학적 관점을 부정하는 사람을 설득하고, 친환경적인 신기술을 개발하고, 정부의 의지와 소비자의 합리적인 선택을 통해 기후변화 대응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모든 시도만큼이나 우리 각자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문화’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는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전 세계의 행동을 촉구하며 유네스코가 강조해 온 “기후가 아닌 우리 마음을 바꾸자”(Changing minds, not the climate)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유네스코는 기후변화에 있어 문화의 역할이 그간 여러 논의나 협정 체결 과정에서 과소평가됐다고 진단한다. 기후변화가 과학뿐만 아니라 윤리, 사회, 교육, 문화 등 방대한 분에 걸쳐있는 문제임에도 그 모든 측면이 지금껏 골고루 다뤄지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중들뿐만 아니라 정부 단위의 논의기구에서도 문화 분야는 주로 기후변화의 ‘피해자’ 또는 ‘수동적인 변수’ 측면에서만 주로 인식돼 왔다. 해수면 상승으로 물에 잠기는 문화재나 환경오염으로 큰 타격을 입는 생물권 보전지역과 자연유산 등은 크게 부각되는 반면, 기후변화 대응에 실질적으로 효과를 낼 수 있는 ‘강력한 도구’로서의 스포트라이트는 주로 과학기술과 혁신하는 기업들의 몫이었다. 물론 ‘더 많은 태양광 발전기와 전기차, 더 적은 일회용품 사용’과 같이 우리가 조금만 바뀌면 할 수 있는 것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지금 당장 이 지구가 필요로 하는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 지면서, 모두의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문화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지혜와 영감으로부터의 해답
문화가 기후변화가 야기할 피해의 종속변수에 그치지 않고 기후변화에 대응할 인류의 중요한 무기이자 자원이라는 인식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점점 많은 지지를 받고 있으며, 신기술 개발과 시장 위주로 마련된 기존의 기후변화 대응책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 2월 24-28일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52차 세션에서 전문가들은 “기후변화가 전 세계의 문화 및 자연유산에 엄청난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인류가 기후변화로 인한 부정적 영향을 ‘경감’(mitigation)하고 기후변화로 인한 변화에 ‘적응’(adaptation)하는 데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네스코 역시 문화가 지금껏 인류가 추진해 온 기후변화 대응책에서 ‘새로 발견한 우물’(untapped wellspring)이 될 수 있다고 표현한다. 전 세계의 수많은 문화 및 자연유산 구역,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만든 문화 관련 정책이나 보고서, 혹은 가이드라인들이 기후변화로 인한 충격을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재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생물권보전지역과 지질공원, 세계자연유산 등은 중국 영토와 맞먹는 1천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며, 이 중 열대지역과 그 주변에 위치한 구역들은 2014년 기준으로 약 57억 톤의 탄소를 흡수함으로써 지구의 중요한 탄소 흡수원(carbon sink)으로 기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지속가능한 관광의 모델과 방식이 연구·적용되고 있으며, 전 세계 246개 도시가 가입한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는 인류가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4분의 3 이상을 차지하는 도시 지역에서 책임감 있는 생산과 소비를 장려하고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한 선도적이며 창의적인 정책을 실천해 나가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충격을 경감하는 역할 외에도 문화는 이미 발생한 기후변화에 인류가 효과적으로 적응하는 것을 돕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각 민족의 언어와 전통을 비롯해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쌓아 온 문화적 산물들은 수백 년에 한 번 일어날 만한 재난을 점점 자주 맞닥뜨리고 있는 오늘날의 인류에게 ‘미래를 대비하는’(future-proofing) 지혜를 전해줄 수 있다. 유네스코는 세계 곳곳의 토착민들과 그들의 전통문화 속에 인류가 미래에 닥칠 어려움을 극복하게 도와줄 실마리가 들어있다고 보고, ‘링스 프로그램’(Local and Indigenous Knowledge Systems programme, LINKS)을 통해 각 지역과 토착민들의 지식을 발굴해 이를 기후과학 및 관련 정책에 반영되도록 돕고 있다. 지역적이며 전통적인 지식이 현대의 과학기술과 만났을 때 기후위기의 해결책을 찾을 가능성을 훨씬 높여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예컨대 2015년에 사이클론 ‘팸’(Pam)이 남태평양의 섬나라 바누아투를 강타했을 때, 전통 재료 및 기술로 지은 현지 전통 가옥(나카말, nakamal)들은 현대 기술과 재료로 모방한 전통 가옥에 비해 훨씬 적은 피해를 입은 바 있다. 유네스코는 지역 전통 문화를 통해 전승되는 이러한 지식이 지역 사회의 회복력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인류 전체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상을 뛰어넘는 그날을 위해
기후변화가 우리 모두의 행동의 변화를 통해서만 멈춰세울 수 있는 것이라면, 유네스코는 기후변화는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주제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어떠한 대책이 모두의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또다른 불평등을 낳거나 취약한 사람들을 양산하는 원인이 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네스코가 가치 중심적인 접근법을 강조하며 2017년에 채택한 ‘기후변화윤리원칙선언’과 같이 ‘기후가 아닌 우리 마음을 변하게 만들’ 방법들은 앞으로도 더 많이 소개되어야 하고,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어 전체 문명 단위의 변화를 만들어야만 한다.
미국 유력 정치인 중 환경 문제에 가장 관심이 컸던 인물로 손꼽히는 앨 고어(Al Gore)는 부통령 재임 당시 진행한 인터뷰에서 국제적인 기후변화 대응책에 관한 질문을 받자 “정치적으로 최대한 실행 가능한 합의를 한다고 해도, 아니 정치적으로 최대한 ‘상상’할 수 있는 합의에 이른다고 해도, 과학적으로나 환경적인 측면에서 반드시 달성해야만 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은 바 있다. 그의 말은 마치 자기실현적 예언처럼 4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가 성난 얼굴로 기성세대 모두에게 아무리 호통을 쳐도,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아무리 ‘북극곰을 살려주세요’라고 써붙여도, 파국을 향해 일관되게 흘러가는 인류의 시간을 되돌릴 상상 이상의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기존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 낸 것은 언제나 문화의 역할이었다. 그럴듯한 정치적 타협과 그럴듯한 소비와 그럴듯한 행동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문화를 통해 변화에 대한 갈망을 마음 속에 만들어낼 수 있다면, 우리와 지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상상 이상의 변화는 어느날 갑자기 우리 앞에 찾아올지도 모른다.
[참고자료]
· UNESCO 『The Tracker Culture & Policy』 (Issue 4, December 2020)
· axios.com “Putting Elon Musk’s Tesla into Climate Change Perspective” (2018.8.27)
· behavioralscientist.org “Climate Change and Our Emerging Cultural Shift” (2019.9.30)
· carbonbrief.org “Factcheck: How Elecric Vehicles Help to Tackle Climate Change” (2019.5.13)
· nytimes.com “Not So Fast” (1995.7.23)
· unesco.org “Experts Highlight the Role of Culture for Climate Change Mitigation and Adaptation” (2020.2.24)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