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과 의궤
수원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화성은 멀리서 보면 장엄하고 가까이서 보면 섬세하다. 성곽을 따라 걷고, 수원화성박물관에 들러 축성 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를 보고 나면 정조의 개혁 정신과 기록 정신이 마음에 깃든다.
화성의 역사는 조선 22대 왕인 정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며 팔달산 아래에 군사·행정·상업 기능을 갖춘 신도시를 건설하도록 했다. 화성을 통해 정치를 개혁하고 인재들을 고루 등용하려는 정조의 꿈이 담긴 계획이었다. 1796년 9월 장안문,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 4대문을 5.74km의 성벽으로 잇는 화성이 완공됐다. 놀랍게도 1794년 1월 착공한 지 2년 8개월 만에 읍성과 산성이 결합된 화성을 완성한 셈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화성 축성 직후 공사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한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를 편찬한 것이다. 1800년에 간행된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공사에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 물건을 들어올리는 ‘거중기’와 ‘녹로’를 사용했다는 기록도 그림과 함께 남아있다. ‘화성성역의궤’는 세계에 화성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도 공헌했다. 화성은 동서양의 과학적 특성을 융합한 18세기 동양의 성곽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는데, 이는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을 바탕으로 고증해 축성 당대 건축물의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화성성역의궤’는 세계기록유산인 ‘의궤’의 일부이기도 한데, 그 가치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화성의 정문, 장안문 앞에 서자 위풍당당한 2층 누각과 장안문을 반원형으로 빙 두른 옹성이 시선을 끈다. 옹성은 장안문을 보호하고 적군을 공격할 수 있는 군사 시설이다. 장안문 옆에는 북동적대와 북서적대가 늠름하게 서 있다. 적대 역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는 군사 시설이다. 옹성과 적대는 화성 건립을 진두지휘한 정약용과 실학자들이 동서양의 요새를 연구해 새로운 양식의 성곽을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장안문 안으로 들어서자 도시의 소음은 지워지고 나무 잎사귀를 흔드는 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가까이서 보니 성곽은 석재를 차곡차곡 쌓은 후 그 위에 벽돌로 몸을 숨기기 좋은 낮은 담장을 쌓아 올린 견고한 모양새다. 화서문을 향해 걸으며 220여 년 전 사람들이 성벽을 쌓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어느 새 성벽은 화서문을 지나 언덕으로 이어진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이 세운 서북공심돈과 1층 문루에 팔작지붕을 올린 화서문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벽을 따라 팔달산으로 조금 더 오르자 감시용 시설, 서북각루가 시야에 들어온다. 신발을 벗고 서북각루에 앉으니 누각 너머로 능선을 따라 도시를 휘감은 화성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림 같은 풍경은 화홍문에서도 이어진다. 화홍문은 물길을 조절하는 수문으로 경관이 빼어나다. 7개의 수문이 있는 다리 위에 세운 누각은 멀리서 봐도 멋스럽다. 누각에 앉아 바라보는 수원천 풍경도 시원스럽다. 화홍문 동쪽 언덕에는 방화수류정이 고아한 자태를 뽐낸다. 과거 방화수류정은 군사 시설이자 경치를 조망하는 정자의 역할을 겸했다. 세월이 흘러도 경치는 여전하다.
이제 의궤(儀軌, 조선 시대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상세한 내용을 정리한 기록)를 보기 위해 수원화성박물관으로 발길을 돌린다. 정조대왕의 화성행차와 수원에서 펼친 왕실 잔치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 화성 축성의 전말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정조의 효심을 한글로 기록한 ‘뎡니의궤’에는 세밀한 그림과 촘촘한 글씨가 가득하다. 직접 보니 의궤를 왜 기록문화의 정수로 꼽는지 알 것 같다. 화성의 역사적 가치를 증명해주는 기록이자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기록문화유산이라는 것을.
수원 여행자 노트
▷ 수원화성박물관 | 화성축성실에서는 ‘화성성역의궤’와 화성 축성에 관련된 유물을, 화성문화실에서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한 전시를 볼 수 있다.
▷ 화성어차 | 화성어차를 타고 화성의 관람 포인트를 돌아보자. 조선시대 국왕의 가마와 순종이 타던 자동차를 모티브로 만든 관광열차다.
▷ 국궁 체험 | 정조의 친위부대 장용영이 무예를 연마하던 연무대에서 국궁 활쏘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조선의 임금전용 곰 과녁을 명중시켜 보자.
글, 사진 우지경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