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본부 예술작품 탐방
파리 유네스코 본부 구석구석에는 700여 점의 다양한 예술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문화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기구답게 유네스코 본부는 그 자체로 일종의 박물관이기도 합니다. 최근 프랑스에서도 여러 방역 조치가 완화되면서 유네스코 본부를 탐방하는 가이드 투어도 재개되었는데요. 유엔 기구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예술 소장품을 자랑하는 이곳에서 방문객들은 어떤 작품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유네스코 건물 안에 들어서면 현대 조각의 거장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Walking Man)이 먼저 이목을 끕니다. 2015년 그의 작품 중 하나인 ‘가리키는 사람’(Pointing Man)이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1억 4천만 달러에 낙찰된 것을 보면, 이 작품 역시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자코메티는 조각상을 통해 팔다리가 끝없이 뻗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실 모양의 인물을 창조했고, 묘한 허약함과 강한 결의의 조합이 비현실적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합니다. 한사람의 에너지와 추진력으로부터 나오는 내면의 힘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했다고도 합니다. 앙상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뼈대만 남은 듯한 조각상 안에서, 어딘가를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는 강인한 인간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자코메티의 조각을 지나 유네스코 총회를 비롯한 주요 회의가 열리는 1번 회의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파블로 피카소의 벽화 ‘이카루스의 추락’(Fall of Icarus)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1957년 유네스코 ‘건축 및 예술 작품위원회’에서 예술가 11명에게 유네스코 본부에 설치할 작품을 의뢰했는데, 이 작품 역시 그 중 하나입니다. 약 100평방미터 크기의 대형 벽화인 이 작품은 아크릴 물감으로 칠을 한 나무 패널 40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유네스코는 이 그림이 푸른 바다를 향해 추락하는 사람이 있는 해변 장면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피카소의 서명이 없는데요. 이 작품이 1번 회의장 앞에 설치되면서 난간이 그림을 가리는 바람에 제대로 감상할 수 없게 된 것에 실망한 피카소가 끝내 작품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사무국 직원들 사이에 떠돌고 있습니다.
시선을 돌려 건물 밖으로 나가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이스라엘이 기증한 유네스코 헌장 전문 첫 구절을 10개 언어로 번역한 유네스코 헌장비와 올리브나무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칼더의 철제 조형물 ‘나선’(Spirale), 덴마크가 기증한 ‘상징 지구본’(Symbolic Globe), 일본이 기증한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인 ‘명상 공간’(Meditation Space) 역시 유네스코 본부 방문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지난해 설립 75주년을 맞은 유네스코는 소장하고 있는 예술품 700여 점 중에서 평화와 관용, 다양성 등 유네스코의 핵심 가치를 반영하는 주제에 걸맞은 75개의 예술품을 선정해 기념 도록을 출간했습니다. 오드레 아줄레 사무총장은 이 도록이 지난 수십년간의 문화 외교에 대한 찬사이자 유네스코의 조직 정신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여정이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유네스코 본부에는 한국 작가의 작품들도 있습니다. 이번 도록에 수록된 강익중 작가의 설치작품 ‘청춘’(Power of Youth), 민경갑 화백의 추상화 ‘자연 속으로’(Towards Nature)를 비롯한 회화와 고려청자 등 총 다섯 점이 본부 곳곳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한류 붐을 타고 ‘K-아트’의 가치도 점점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유네스코 내 한국 소장품들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 중에서 2007년에 강익중 작가가 기증한 작품 ‘청춘’을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이 작품은 우보 민태원 선생의 산문 ‘청춘예찬’의 일부를 한글과 달항아리를 활용한 작가 특유의 기법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수작입니다. 한글이 주는 특별한 의미 때문에 75주년 기념 도록에는 ‘문해’라는 키워드로 수록됐지만, 이 작품은 그 어떤 작품보다 ‘소통’과 ‘연결’의 의미가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작가 역시 오랫동안 그의 작품 세계에서 소통의 의미를 강조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유네스코의 정보커뮤니케이션 분야 사무실들이 위치한 5층의 메인 홀에 이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제 다시 하늘길이 열리면 얼른 파리 유네스코 본부를 방문해 이 작품들을 직접 보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그 전에 서울 명동의 유네스코회관에서 강익중 작가의 또다른 작품인 ‘우리, 꿈, 평화’를 한번 감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강익중 작가가 2008년에 기증해 회관 1층에 자리를 잡은 이 작품은 유네스코 본부의 ‘청춘’과 닮은 듯 다른 느낌을 줍니다.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도 하나로 연결되어 소통을 매개하는 이들 작품을 통해, 상호 소통과 이해를 바탕으로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가고자 하는 유네스코의 이상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임시연
주유네스코 대한민국대표부 주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