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IHP 9단계 전략계획
제24차 유네스코 정부간수문학사업(IHP) 이사회가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각국은 향후 8년간의 IHP 사업방향을 구상하는 ‘IHP 9단계 전략계획’의 최종 합의안을 도출함으로써 지속가능한 물관리를 위한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연결고리이지만, 인권에서부터 국가 간 분쟁에 이르기까지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는 물이 기후변화에 있어 가장 취약한 분야이며, 지속가능한 물 관리는 우리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도 절실한 문제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24차 유네스코 정부간수문학사업(IHP) 이사회가 마련한 유네스코 IHP 9단계 전략계획(IHP-IX, 2022-29)은 오는 2029년까지 8년간 전 세계가 힘을 모아 물 걱정 없는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는 구체적인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IHP 9단계 전략계획 논의의 핵심 쟁점은 ‘접경하천’(transboundary water) 문제였습니다. 접경하천과 수자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인접국 간의 정치적 다툼은 전쟁으로 비화되기도 할 정도로 민감한 이슈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강 상류에 있는 국가가 댐 건설 등을 통해 물을 가둘 경우 하류에 있는 국가는 물부족에 시달리며 농사 등에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에, 하류에 위치한 국가는 이 문제를 국제기구가 중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상류에 위치한 국가는 이것이 자국의 주권을 침해한다며 반대하고 나서는 겁니다. 최근에는 나일강 상류에 위치한 에티오피아가 국운을 걸고 건설 중인 대규모 댐이 완공될 경우 야기할 수 있는 막대한 피해에 맞서 이집트가 전쟁까지 불사하겠다고 나서며 일촉즉발의 긴장이 발생하기도 했고, 메콩강 유역에서는 중국,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등 여러 인접국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이번 전략계획에 국가 간 갈등 관리 문제를 어떤 식으로 반영할지를 두고 회원국들은 오랜 기간 논쟁을 벌였습니다. 터키와 프랑스 등은 전략계획에서 접경하천 문제를 다루는 것조차 격하게 반대했고, 이집트 등 일부 회원국들은 조용히 찬성 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특히 반대 의견을 표명한 국가들은 전략계획에 접경하천을 포함한다면 ‘평화 추구’라는 말도 빼버리라는 극단적인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회원국들은 치열한 논의 끝에 터키의 발의로 접점을 찾아 9단계 전략계획 합의안을 극적으로 타결했고, 사무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호할 수 있었습니다.
접경하천 문제 외에 이번 논의에서 쟁점이 되었던 것은 ‘시민과학’(civil science)입니다. ‘오픈 사이언스’ 등 최근 과학 분야에서 시민사회의 참여를 중시하는 유네스코 내 흐름에 맞춰 물과학 중장기 계획에도 시민과학 개념을 도입하려 하며 논의가 촉발되었는데요. 전문가들의 의견을 받아 작성한 초안을 두고 도대체 시민과학이 무엇인지, 전문적인 과학지식과 대중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과연 유네스코가 시민과학을 다루는 것이 적합한지에 대해 회원국 간 열띤 토의가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시민과학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이번 논의에 적극 참여했고, 결국 다수 회원국들의 지지에 따라 시민과학 역시 이번 전략계획에 적절히 반영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련된 IHP 9단계 전략계획은 우선순위 세부 주제로 ▲과학 연구와 혁신 ▲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물교육 ▲데이터와 지식 격차 해소 ▲글로벌 변화에 따른 포용적 물관리 ▲과학에 기반한 물 거버넌스 등을 담고 있습니다. 2022년부터 2029년까지의 9단계는 시기적으로도 유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의 마지막 8년과 맞닿아 있어 지속가능발전목표 6번(SDG 6)의 이행을 위해서도 전력을 다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유네스코는 8단계의 연장선상에서 9단계에서도 철저한 데이터 구축과 분석을 통해 증거에 기반한 물 관련 해결책을 만드는 데 역점을 둘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IHP 논의가 회원국 정부의 정책에 더 많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IHP 전반의 기조와도 부합합니다.
내년부터 새롭게 도입될 유네스코의 물관리 중장기 계획과 연계하여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이미 한국은 물 분야 카테고리2센터인 유네스코물안보국제연구교육센터(i-WSSM)를 물안보 교육의 거점으로 운영하고 있고, 개도국의 물안보 및 물관리 정책능력을 배양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등 물 분야 국제협력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 물과학국에서 파견근무 중인 환경부 손옥주 국장은 “우리나라는 정부조직개편을 통해 이미 물관리 일원화를 달성했고 그린뉴딜 정책을 통해 스마트 물관리를 하는 등 전 세계에서 선도적인 물관리 국가로 꼽히고 있다”며, “IHP 사무국이나 회원국들이 한국에 거는 기대를 현장에서 느낄 수 있어 자부심을 갖고 있고, 스마트 물관리 등 우리의 좋은 정책이 개도국으로 잘 전파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물을 관리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세계 평화를 향한 길이기도 합니다. ‘아전인수로 인한 물꼬싸움이 가장 극렬하다’는 말이 있듯, 물은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기에 가장 양보하기 힘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유네스코 IHP 9단계 전략계획이 지속가능한 물관리와 국제협력을 통해 물 걱정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마중물 역할을 잘 해내기를 기대합니다.
임시연 주유네스코 대한민국대표부 주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