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박물관의 밤’ 맞은 파리의 봄밤
팬데믹으로 잔뜩 웅크려야만 했던 문화예술계가 이제 다시 기지개를 켜면서, 문화를 담당하는 국제기구인 유네스코 본부도 더욱 활기가 느껴집니다. 매년 5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박물관들이 개최하는 특별한 행사 현장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5월 14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30여 개국의 3천 곳이 넘는 박물관에서 ‘유럽 박물관의 밤’(La nuit Européenne des musées) 행사가 시작됐습니다. 이날 유럽의 주요 박물관들은 해질녘부터 자정까지 무료 개장을 하는 한편, 스토리텔링 투어와 음악회, 영화 상영, 라이브 공연, 불꽃놀이 등 다채로운 행사를 통해 대중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펼쳤습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지난 2년간 박물관을 비롯한 문화 예술 활동이 축소되었던 터라, 이번 박물관의 밤에는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습니다.
올해로 벌써 18회 째를 맞고 있는 유럽 박물관의 밤은 2005년 프랑스 문화부를 주축으로 유럽평의회, 유네스코, ICOM(국제박물관협의회)의 후원을 받아 1997년 독일에서 열린 박물관의 밤 행사를 전신으로 하여 시작됐습니다. 이후 규모와 다양성 면에서 그 지평을 점차 넓혀왔고, ICOM이 지정한 박물관의 날(5.18)과도 연계해 실시되면서 5월은 그야말로 박물관의 달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또한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문을 닫았던 박물관들이 이번 유럽 박물관의 밤을 맞아 재개장을 하는 등의 반가운 소식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제가 이번 박물관의 밤에 방문한 곳은 ‘프티 팔레’(Petit Palais) 미술관입니다. 이곳은 평소에도 무료 입장이 가능한 곳이라 오늘 같은 날에 상대적으로 방문객이 적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대기줄은 끝도 없이 길었습니다. 오랑주리 미술관이나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 자연사 박물관 등 인기 있는 박물관의 경우 예약을 하고 가도 한참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만큼 팬데믹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술과 문화의 축제에 목말라하고 있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프티 팔레 곳곳에서는 밤 늦게까지 바이올린과 플루트의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펴졌고,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은 때마침 드리워진 보름달과 선연히 조화를 이루면서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방문객들은 이 풍경을 담느라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습니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매달 첫 번째 일요일마다 박물관을 무료 개장하기에, 박물관의 밤이 특별한 이유는 ‘무료’에 있다기보다는 ‘밤’이 주는 의미 때문일 것입니다. 같은 작품이라도 파리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낮의 박물관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별한 감동을 어스름한 달빛 아래 밤의 박물관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깜깜한 밤을 다채롭게 밝혀주는 횃불투어와 불꽃놀이, 시음회, 라이브 공연 등의 이색적인 행사 또한 자칫 무채색으로 느껴질 수 있는 박물관에 색깔을 더해줍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박물관을 좀 더 가깝게 느끼게 만들어 주는 행사들이지요. 그중에서도 교육부와 박물관의 협업으로 진행하는 ‘클래스, 워크!’(Class, Work!)라는 예술문화교육 프로그램이 특히 이목을 끌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펼치는 일련의 활동을 통해 공동 유산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도록 만들어 주고, 박물관에도 더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습니다.
유네스코 역시 문화 분야를 담당하는 국제기구답게 유럽 박물관의 밤에 적극 동참했습니다. 지난달 주재관 서신에서 말씀드렸듯 피카소, 미로, 칼더, 자코메티 같은 거장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유네스코 본부는 이미 그 자체로 박물관이라 할 수 있기에, 지난 십여 년간 유네스코도 유럽 박물관의 밤에 대중들에게 본부를 오픈하는 행사를 해 왔습니다. 올해에는 특별히 유네스코 전문가와 관람객 간 대화의 자리를 만들어 코로나19로 한동안 단절됐던 사람들과의 소통에 더 힘쓰겠다는 유네스코의 기조를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파리는 며칠 전부터 대중교통에서의 마스크 착용 의무도 해제했습니다. 매일매일 조금씩 일상을 회복해 나가는 가운데, 파리 곳곳에는 예술과 문화가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파리에 있는 박물관 수만 130여 곳에 달한다 하니, 프랑스가 문화적으로 특별히 윤택하고 비옥한 곳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과거와 현재, 세대와 세대를 잇는 박물관. 유산과 역사를 보존하고 다음 세대로 전승하는 박물관. 이 박물관을 통해 팬데믹 이후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소통과 화합의 마음이 세대와 성별, 국적과 인종을 넘어 펼쳐질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임시연 주유네스코 대한민국대표부 주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