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
다자주의의 ‘존재 이유’(raison d’être, 레종 데트르)는 무엇일까? 다자주의는 안보, 기후, 경제 등 현재 국제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할 실마리로서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10월 5일부터 19일까지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 제215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다자주의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시점에서 유네스코가 되새겨야 할 정신과 나아갈 길을 고민해 볼 수 있었던 자리였다.
대화와 교류, 그리고 공동 성찰(common reflection)의 정신.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다자주의의 레종 데트르를 이처럼 언급하면서 제215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의 시작을 알렸다. 이번 집행이사회에 참가한 58개 이사국과 옵서버 회원국 대표들은 코로나19 장기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및 이로 인한 안보 위기,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여성 교육권 박탈 문제, 기후위기 등의 다양한 도전과제를 언급하였고, 이러한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다자협력을 강화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유네스코의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조연설자로 나선 박상미 주유네스코대한민국대표부 대사는 지난 제77차 유엔 총회에서 국제사회의 연대와 보편적 국제규범 준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유엔기구와의 협력과 지원을 확대해 나갈 의사를 밝힌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언급하면서, 같은 맥락에서 한국이 유네스코와 지속해서 협력함으로써 다자주의 실천에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최근 여러 국제무대에서 벌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집행이사회에서도 많은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화상 연설을 통해 현 상황을 상세히 공유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유네스코 회원국의 지속적인 연대와 지원을 요청했다. 반대로 러시아 대표는 유네스코 전반에 ‘러시아 포비아’가 조성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유네스코가 중립성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지적 연대를 통한 세계 평화를 사명으로 삼는 유네스코의 무대에서 국가 간 갈등 상황이 다시금 부각되는 순간이었다. 집행이사회에서는 이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논의 주제에서도 이러한 갈등 양상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국들은 앞서 언급한 전 지구적 도전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그러한 공동의 노력을 어떠한 내용과 방식으로 실천해야 할지에 대해 각국이 부단히 대화를 나누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도 했다. 특히 전쟁이나 분쟁 등의 상황에서도 누구나 계속해서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일, 과학적 지식을 공유하여 전 지구적 문제를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일, 인공지능을 윤리적으로 활용하는 일, 문화 다양성을 지키고 그 발전을 도모하는 일, 허위정보 유포와 혐오 발언을 근절하는 일 등을 실천하는 데 있어 유네스코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믿음은 굳건해 보였다. 때로 늦은 밤까지 이어진 논의에도 모든 참가자들이 지치지 않고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도 그러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한국 대표단은 글로벌 수준에서 유네스코의 교육분야 리더십을 높게 평가하면서 문화예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더불어 오랫동안 지속된 유네스코의 지역사무소 네트워크 개편 작업이 적시에 완료돼야 한다고 강조하며, 인플레이션에 따른 예산 부족 문제와 관련해 사업 우선순위 조정과 비용 절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네스코의 고등교육기관 협력 사업인 유니트윈/유네스코 석좌 프로그램의 효과적 이행을 위한 국가위원회의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프랑스와 스위스, 네덜란드의 공식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국가위원회 역할을 강조하는 결정문 채택을 이끌어냈다.
수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내부에는 여전히 많은 과제가 쌓여있다. 유네스코의 오랜 재정난은 최근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더욱 심해지고 있으며, 유네스코 활동의 효과성과 가시성을 제고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한 지역사무소 네트워크 개편 작업도 매듭짓지 못한 상태로 향후 집행이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겨졌다. 다자주의에 기반한 공동의 결의와 노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더욱 부단한 대화와 교류, 그리고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이영은
국제협력팀 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