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미군의 마지막 수송기가 아프가니스탄을 떠나면서 20년간 지속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막을 내렸다. 하지만 미국과의 전쟁이 끝났을 뿐, 이 땅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믿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거의 없다. 아프간 국민들은 다시 내전과 탈레반의 억압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유네스코도 8월 말 아프간의 교육권, 문화, 그리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성명을 잇따라 내놓으며 전 세계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20년의 명과 암
끊임없는 공습과 전투, 그리고 보복 테러의 악순환 속에서도 지난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의 모습은 꽤 많이 달라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추가 파병 결정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된 사진으로 알려진,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성들이 활보하던 그 유명한 1970년대 카불 시내 모습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덧 아프간 곳곳에서는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여학생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70%에 달하는 휴대전화 보급에 힘입어 SNS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표명하는 아프간인이 440만 명에 달했으며, 유네스코 주도로 모인 전 세계 전문가들은 2001년에 폭파된 바미안 계곡의 거대 불상의 복원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나누기도 했다.
물론 위 통계를 소개한 『BBC』의 기사에도 나와있듯 아프가니스탄이 마냥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발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외부 원조 의존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아프간 경제는 원조 규모가 줄어들자 함께 어려움을 겪어, 2016-2017년에는 전 인구의 54%가 약 31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한 달을 버텨야 하는 빈곤 상태에 빠져 있었다. 지방에서는 지난 20년간 아편 재배가 2.5배 이상 늘어 영국으로 유입되는 헤로인의 95%가 아프간에서 생산될 정도였다. 결국 어떤 지원도 아프간의 가난과 부패, 종교적 맹신을 끊어내기엔 역부족이었고, 가난과 불신의 그림자 아래서 숨죽이고 있던 탈레반은 다시 전 국토를 장악하고 말았다. 동시에 지난날 아프간에서 일어난 모든 변화들도 흘러간 일이 되고 말 위기에 처해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가 지난 20년간 매달렸던 아프가니스탄의 재건 사업은 실패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실패가 그간의 모든 노력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릴지, 아니면 언젠가 지금까지의 성과 위에서 다시 희망을 일구는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국제사회의 추가적인 노력 여하에 달려있기도 하다. 여러 국제기구와 시민단체가 아프가니스탄을 잊지 않고 그곳의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지난 8월 18일부터 사흘에 걸쳐 유네스코가 세 개의 성명을 연이어 내놓은 것도 아프간의 현 상황을 명확하게 알리고, 너무 늦지 않게 국제사회의 의미 있는 행동을 이끌어내려는 절박함의 발로였다. 2002년 이후 유네스코는 국제사회 파트너들과 함께 아프간의 교육 시스템을 재건하고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과학적 역량과 언론 자유도를 높이기 위한 여러 프로그램들을 시행해 왔다. 그리고 교육과 문화, 표현의 자유에 관한 세 건의 성명을 통해 그간 아프간에서 일구어 낸 결코 적지 않은 결실들이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단지 아프간 국민들뿐만 아니라 서아시아 지역 전체의 안녕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은 교육
유네스코는 먼저 8월 18일에 아프간에서 어떠한 차별도 없는 교육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전 세계의 노력을 요청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특히 여성을 포함해 ‘모두를 위한 교육’이라는 기본권이 지켜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지난 20년간 교육 분야에서 만들어 온 분명한 변화들이 뒷걸음질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아프간에서 학생과 교사 및 교육 관계자들에게 안전한 교육 환경이 보장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여성들이 아무런 제한 없이 가르치고 배울 수 있도록 하는 데 아프간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도 덧붙였다.
1948년부터 아프가니스탄의 교육 역량 강화를 위한 기술적 도움을 제공해 온 유네스코는 교육이 여타 기본권을 지키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자 국가 발전의 토대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때문에 유네스코 카불사무소를 통해 여성 교육 보장을 위한 정책 수립에 많은 공을 들였으며, 2006년부터 아프간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문해 증진 캠페인을 펼쳐 80만 명의 여성을 포함한 120만 명의 아프간인들에게 교육의 혜택을 제공하기도 했다. 유네스코가 9월 10일에 내놓은 보고서 「The Right to Education: What Is at Stake in Afghanistan?」(교육받을 권리: 아프가니스탄에서 위험에 빠진 것은?)는 교육 분야에서의 그러한 노력이 실제로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루어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20년간 아프간의 교육 분야 지표 변화를 정리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해당 기간 동안 아프간에서는 등록 학생 수가 약 1백만 명에서 1천만 명으로 늘었고 교사 수는 58% 증가했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여성 교육과 관련된 지표의 개선이다. 여성 문해율은 17%에서 30%로 두 배 가까이 높아졌고 2001년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던 초등 여학생 수는 2018년 기준 250만 명에 달했으며, 같은 기간 내 고등교육기관 내 여학생 수도 5천 명에서 9만 명으로 늘었다.
물론 보고서는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프간의 교육 분야에서 아직 ‘엄청나게 많은’(colossal) 과제들이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초등학생 연령대 어린이의 절반이 아직 학교에 등록하지 못했고 아프간의 초등 고학년 학생 중 93%가 읽기를 능숙하게 배우지 못한 상태다. 여기에 코로나19로 인한 학업 중단까지 겹치면서 지난 2년간의 교육 환경은 더욱 악화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탈레반의 차별적인 교육 정책이 더해진다면 그간 어렵게 일구어 낸 결실마저도 몇 년 안에 허사가 될 위험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네스코는 지난 2015년에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서명한 ‘안전한 학교 선언’(Safe Schools Declaration)을 탈레반 정부가 뒤집지 않도록 국제사회가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전체 교육 예산의 절반 이상을 외부 원조에 의지해 온 아프간의 교육 환경이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모두가 뜻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찢긴 마음을 다시 모으기 위한 문화
아프간 정부가 무너지고 탈레반이 승리를 선언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20년 전에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던 바미안 석불 폭파 장면을 떠올렸을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2001년 3월, 바미안 계곡의 거대 불상들이 탈레반의 손에 무참히 부서져 내리던 광경은 문화유산의 약탈과 파괴가 해당 지역의 역사와 문화, 나아가 민족과 사회 구성원의 정체성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일임을 우리 모두가 실감하게 해 준 사건이었다. 유네스코는 2003년에 문화재 파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 지역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면서 동시에 위험에 처한 문화유산 목록에도 올렸고, 이후 아프간 곳곳에서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현지의 유산 전문가와 예술가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문화적 활동을 펼치도록 도움을 제공해 왔다.
혹자는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인권이 말살되는 상황에서 문화유산 보호가 과연 시급한 일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네스코는 20년 전 탈레반의 유적지 파괴가 단순히 가치 있는 재산에 물질적 피해를 입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지역 사회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위협이었음을 상기시키며 “문화적 다양성 보호는 사치가 아니라 평화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기초”임을 강조해 왔다. 이에 지난 8월 19일 “아프가니스탄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국제법에 따라 보존하고, 문화유산의 파괴 혹은 손상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하는 성명을 내고, 20년만에 기로에 선 아프간에서의 문화 사업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과 참여를 호소했다.
유네스코는 특히 문화유산과 문화다양성을 보호하는 것이 아프간 민족의 단합과 사회적 측면에서도 중요하다고 보고, 궁극적으로 아프간의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오랜 내전으로 찢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수 있는 문화의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유네스코 카불 사무소에서 근무하며 여러 문화 분야 사업에 참여했던 송첫눈송이 전 직원도 『유네스코뉴스』 인터뷰를 통해 “분쟁 지역에서 유네스코의 문화 업무를 담당하며 가장 중요하게 살펴야 한다고 느꼈던 것이 현지인들의 자긍심 및 자존감과 연관된 부분”이라며 “오랜 기간 분쟁 혹은 전쟁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스스로의 생활 양식에 대한 낮은 자존감과 거부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인 내적 치유를 여타 개발 협력 활동과 병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대물림되는 가난과 끊임없는 테러로 패배감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다시 일어설 힘을 갖도록 하기 위한 문화의 역할이 정치·경제적인 인프라 재건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뤄져야만 한다는 뜻이다.
갈림길에 선 사람들의 목소리
탈레반 정부는 8월 말에 아프간 전역을 다시 장악한 이후 지속적으로 자신들이 과거의 탈레반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여성들의 교육을 막지 않을 것이며,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언론인에 대한 위협을 가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발표했다. 하지만 8월 말 독일 공영 국제방송국 『도이체벨레』는 “발표 열흘만에 탈레반 전사들은 아프간 내 언론인들과 그 가족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보도하며 탈레반 정부의 약속이 사실상 공염불에 그치고 있음을 지적했다. 해당 기사는 또한 “문화적 프레임워크(cultural framework) 내에서 언론을 보호하겠다”던 탈레반 정부의 발표 역시 모호한 표현이라 지적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문화’적 프레임워크가 보편적이며 열린 문화가 아니라 차별적이며 억압적인 탈레반의 극단적 이슬람 ‘문화’는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고 밝혔다.
유네스코는 탈레반 정부의 언론 자유 보장 관련 발표가 있은 지 사흘만인 8월 20일에 아프간 내 표현의 자유와 언론인 보호를 촉구하는 성명을 내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언론을 통해 정확한 정보를 얻고 공개적인 의사표현을 하는 것은 아프간 국민들이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임을 강조한 바 있다. 지난 20년간 언론 활동을 보장하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에서부터 언론인 교육, 성평등에 입각한 보도 장려, 교육방송 강화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아프간 언론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해 온 유네스코는 다양하고 전문적이며 역동적인 언론이야말로 아프간의 상황이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을 감시자로서 반드시 그 활동을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프간에서는 올해에만 여성 언론인 네 명을 포함한 일곱 명의 언론인이 취재 도중 살해됐으며, 최근의 폭력 사태와 공공연한 위협 앞에서 헌신적인 활동을 이어온 언론인들도 점점 그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지금이 아프간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요한 갈림길”이라며, “따라서 누구든 자신의 생각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어야만 하고, 이를 위해 여성을 포함한 모든 언론인들의 활동이 반드시 보호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국제사회가 이를 잘 살필 것을 촉구했다.
여기까지가 아니라, 바로 지금부터
많은 사람들이 아프간의 교육과 인권, 문화, 표현의 자유 등이 20년 전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미 아프간 여성들의 머리엔 부르카가 씌워졌고, 학교에서는 글 읽고 토론하는 소년소녀들의 재잘거림이 더는 들려오지 않으며, 세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자 하는 목소리는 무거운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탈레반의 총구 앞에서 아프간의 남성과 여성, 과학자와 언론인, 학생과 교사에게는 그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일 외에는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조금씩, 그리고 뚜렷이 아프간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 남겨진 그 모든 것들은 정말 하루아침에 없던 일이 돼 버린 것일까. 유네스코는 비록 눈에 잘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수가 적을지라도, 그간 아프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심은 평화의 씨앗이 그리 쉽게 부서져버리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있다. 국제사회가 섣불리 그것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다. 여러 지표들은 지난 20년간 책과 신문을 통해 세상을 보고, 보편적 인권의 존재를 느끼고, 배움이 가져다 줄 희망에 대해 알게 된 사람들이 아프간에 점점 많아지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숫자만큼 아프간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평화롭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갈망도 작은 싹을 틔웠을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작을지라도 그 싹이 죽어버리지 않도록 국제사회가 힘을 모아주는 일은, 그 어느때보다 바로 지금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참고자료]
· bbc.com “In Numbers: How Has Life Changed in Afghanistan in 20 Years?”
· dw.com “The Taliban’s Broken Promise to Protect Journalists”
· unesco.org “UNESCO Director General Calls for Unhindered Right to Education in Afghanistan”, “Afghanistan – UNESCO Calls for the Protection of Cultural Heritage in Its Diversity”, “UNESCO Calls for Respect of Freedom of Expression and Safety of Journalists in Afghanistan”, “UNESCO Sounds a Warning on What Is at Stake for Education in Afghanistan”, “Commemorating 20 Years since the Destruction of Two Buddhas of Bamiyan, Afghanistan”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