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 자리에서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나는 자장면”이라 말하는 사장님을 바라보는 사원들처럼, 당연한 듯 다양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포용에는 인색한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사회 속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알게 모르게 위축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K-콘텐츠’와 함께 세계 문화계를 더욱 풍성하고 다양하게 만들고 있는 우리에게도, 이제는 다양성을 옹호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더욱 북돋고 이끌어낼 수 있는 적극적인 포용의 자세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다양성을 증명하라
2019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화제를 몰고 다녔던 영화 「기생충」은 이듬해 2월 미국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을 수상하며 역사적인 여정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사실 2019년부터 칸 영화제를 포함해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석권해 온 이 영화로서는 비록 가장 인기 있는 시상식이지만 사실상 ‘미국 영화 축제’일 뿐인 아카데미상 수상이 특별히 더 큰 경사는 아닐 수도 있었다. 따라서 당시 전 세계 외신들이 「기생충」이 트로피를 하나 더 받는지 여부만큼이나 주목했던 것은 수상작을 선정하는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 ‘50대 이상 백인 남성 영화인’들이 이 한국어 영화에 상을 줄 의지, 혹은 배짱을 갖고 있는지 여부였다. 『LA타임즈』의 평론가 저스틴 창(Justin Chang)은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을 지지하는 칼럼에서 “지금 증명해야 할 게 남아있는 대상은 「기생충」이 아니라 아카데미 그 자신”이라 쓰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생충」의 수상이 발표되자 『USA투데이』는 “그간 다양성 부재라는 비판과 씨름해 온 오스카가 문제 해결을 위해 최소한 뭔가를 하고 있음을 보여줬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다양성과 형평성, 그리고 포용은 최근 몇 년간 영화를 포함한 세계 대중문화 업계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 화두 중 하나였다. 2016년 아카데미 남·녀 주연상 후보가 전원 백인 배우로 채워지면서 촉발된 ‘#OscarsSoWhite(오스카는 너무 하얗다)’ 운동은 대중들이 과거의 여러 불합리한 수상 내역들까지 되돌아보며 영화계 전반에 다양성 확보를 위한 대책을 세울 것을 요구하게 만들었다. 2017년에는 전 세계 ‘미투 운동’을 촉발시킨 계기가 된 헐리우드의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범죄가 드러났고, 미 문화계는 문화상품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제작 환경 전반에서 성평등과 포용, 다양성을 높일 방안을 적극적으로 강구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 한 예로 아카데미 수상작을 선정하는 AMPAS의 투표인단에서 2015년 당시 각각 25%와 10%에 머무르던 여성과 소수인종의 비율은 2020년 33%와 19%까지 높아졌다. 「기생충」이 비영어권 영화로는 사상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고, 올해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여배우 양자경이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것은 결코 저절로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AMPAS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제작 과정에서 여성과 소수집단, 성소수자, 장애인 등을 더 많이 포용하고 이들이 비중 있게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담은 ‘다양성 기준’을 2025년부터 적용할 계획이라고도 했다.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그 기준은 “▲조·단역의 최소 30% 이상이 다인종,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중 2가지 이상을 포함 ▲영화의 주요 줄거리, 주제 또는 내러티브가 소수자 집단에 관한 내용 ▲책임자 직책 중 적어도 두 명이 소수자 집단(다인종·여성·성소수자·장애인) 출신 ▲전체 제작진의 최소 30%가 소수자 집단 출신” 등이다.
다양성이 곧 경쟁력
주류 문화 시장에서 폭발하고 있는 다양성과 포용에 대한 요구는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K-컬처’라는 이름으로 승승장구 하고 있는 한국 문화상품의 선전과도 일정 부분 맞닿아 있다. 트럼프 전 미국대통령이 세계 무역 시장과 국경에 유·무형의 장벽을 쌓고 있을 무렵, 영화제 수상 소감으로 “1인치의 장벽(자막)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고 말했던 봉준호 감독의 말은 이미 서양 주류 문화권에서도 현실이 됐다. 자막을 읽어야 하는 영화도, 한국어 노래 가사도 더는 어색해하지 않는 전 세계 대중문화 소비자들은 「오징어 게임」 속 한국 놀이를 궁금해하고 「킹덤」의 조선시대 복장에 열광하며 BTS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에 이르렀다. 대중이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며 K-컬처와 세계 시장 사이에 다리를 놓았고, 빼어난 역량을 갖춘 우리 문화가 그 다리를 건너가 더욱 다채롭고 화려한 꽃을 피운 것이다.
국내에서 소비되는 대중문화에서도 그러한 흐름은 점점 더 많이 감지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캐릭터를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순한 등장에 그치지 않고 표현 방식에서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도 고무적이다. 큰 성공을 거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주인공은 더는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며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삶을 영위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실제 발달장애를 갖고 있는 연기자들이 출연해 장애 그 자체가 아니라 연기자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EBS의 대표 어린이 프로그램인 「딩동댕 유치원」에는 40년 만에 처음으로 휠체어를 탄 장애인 ‘하늘이’와 다문화 가정에서 나고 자란 ‘마리’가 주요 캐릭터로 등장했다. 뿐만 아니라 남자 주인공들의 사랑을 다룬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OTT 드라마 「시멘틱 에러」는 반 년 이상 해당 플랫폼의 인기 프로그램 톱10에 머무르고 있으며, 일반인 퀴어 출연자들이 등장하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큰 파장 없이 방영되며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
포용이 다양성을 낳는다
물론 이와 같은 변화만으로 한국의 문화계에서 다양성이 충분히 보장되어 있다고 속단하기는 이르다. 세부적인 부분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여전히 개선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콘텐츠 내 다양성에 관한 몇몇 연구들은 소수 집단이 미디어에 등장하는 빈도 자체가 여전히 부족하며, 등장인물의 젠더나 직업, 나이 등의 측면에서 다양성이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방송통신위원회의 「미디어 다양성 조사」에 따르면 2019년 1-9월에 주요 채널에서 방영된 드라마 등장인물 2713명 가운데 장애인은 0.7%에 그쳤다. 현실의 장애인 비율을 드라마에서도 기계적으로 똑같이 구현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이를 감안해도 국내 등록 장애인이 전체 인구의 5.2%를 차지(2022년 복지부 자료)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너무 낮은 비중이다. 한국방송광고공사가 지난해 내놓은 「2021년 문화콘텐츠 다양성 조사연구」에는 최근 미디어 소비의 중심으로 떠오른 OTT 콘텐츠에 대한 분석이 포함돼 있는데, 이 보고서도 “등장인물의 젠더에서 남성(63.2%)이 여성보다 뚜렷하게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연령과 직업에 있어서도 특정 연령대(30-49세 등장인물이 43.2%를 차지)와 특정 직업군(전문가, 서비스종사자, 관리자가 각각 14.2%, 9.4%, 7.6%를 차지)에 해당하는 등장인물의 비율이 실제보다 높게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발표한 「2021년 한국 영화산업 성인지 통계」에 따르면, 당해 한국영화 흥행 순위 상위 30편의 내용을 바탕으로 성소수자와 장애인, 다양한 인종·종족·국적의 정체성을 가진 캐릭터의 가시성과 스테레오타입 재현 여부 등을 조사하는 ‘다양성 테스트’를 측정한 결과 그 점수는 4점에 그쳤다. 이는 2016년의 28점은커녕 2018-2021년까지 각각 6, 12, 17점을 기록하며 꾸준히 향상되던 흐름에도 미치지 못한 결과다. 흥미로운 부분은 해당 보고서가 “(다양성 테스트 28점을 기록한) 2016년은 여성 감독과 여성 주연 영화의 비중이 가장 높은 해”였으며, “공교롭게도 (4점을 기록한) 2021년은 남성 감독-남성 주연 영화가 강세를 보인 해”라고 지적한 대목이다. 이러한 지적의 요점을 그저 ‘남성이 문제’라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대신 우리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은 “다양성의 양적 증가가 질적 다양성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는 서술이다. 그리고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포용할 수 있는 콘텐츠 제작 환경이 더 우수하고 다양한 콘텐츠로 귀결된다는 분석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2021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애넌버그 포용연구소(Annenberg Inclusion Initiative)가 OTT업체 넷플릭스의 의뢰를 받아 작성한 「넷플릭스 포용 보고서」 역시 콘텐츠 업계가 내용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포용적인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넷플릭스가 업계 평균보다 콘텐츠의 내용면에서나 제작 인력 구성면에서나 다양성을 더 충실히 갖추었음을 보여준 이 보고서에 대해 성욱제 정보통신정책연구원 방송미디어연구본부장은 “핵심 제작 인력의 다양성이 결국 콘텐츠(등장인물)의 다양성을 담보한다는 매우 단순하지만 명쾌한 사실”을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사실을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 이 보고서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도 했다. 해당 보고서를 소개한 버네이 마이어스(Vernā Myers) 넷플릭스 포용전략부문 부사장은 “우리가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은 다양성과 포용을 문화와 짝지을 때 혁신과 창의성과 문제해결을 위한 잠재력이 해금된다는 것”이라며 “다양성과 포용이 집단주의적 사고를 깨고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경험과 관점을 제시하며, 이를 통해 우리가 낡은 방식으로 문제를 풀지 않도록 해 준다”고 말했다.
포용 사회를 향한 출발점
콘텐츠에 더 다양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는 먼저 공평하고 포용적인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는 ‘단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는 것(Leave No One Behind)’이라는 유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의 슬로건과도 맞닿아 있다. 유네스코는 이 슬로건이 곧 ‘모두에게 꼭 맞는 옷은 없다(No One Size Fits All)’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난 3월 유네스코와 함께 아프리카 민속을 소재로 아프리카 영화인들이 만든 단편영화 여섯 편을 전 세계에 선보인 넷플릭스 역시 이 말을 언급하면서 함께 가자는 말이 반드시 똑같은 모습으로 가자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평화와 번영과 지구의 미래를 위해 달려가는 인류의 여정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나이, 성별, 장애, 인종, 민족, 출신, 종교나 기타 사회경제적 지위에 관계 없이”(SDG10.2)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실로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다양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와 시각을 담은 콘텐츠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다양하고 풍부한 아이디어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다양한 구성원들이 편안하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포용적인 환경을 만드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한 정책과 지원 방안과 재원을 효과적으로 마련하는 데 무엇보다 큰 힘이 되는 것은 다양성에 대한 일반 대중의 지지와 적극적인 요청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주변에는 다양성을 당연하다는 듯 지지하면서도 정작 내 집 앞에서 ‘퀴어축제’가 열리는 것에는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다양성의 토대가 곧 포용이며, 포용이 곧 다양성을 낳는다는 사실은 아직 모두에게 충분히 와닿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이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때로는 이를 긍정하지만, 여전히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일상을 영위하는 데는 특별한 각오와 다짐과 용기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많은 시민이 법적으로 우리 사회의 성평등이 완성되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여성은 여전히 출산과 육아 등을 포함해 여성으로서 자신의 인생과 경력을 다져 나가는 데 특별한 각오와 다짐과 용기가 필요하다. 출퇴근 시간에 ‘굳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장애인들이 가져야 할 대단한 각오와 다짐과 용기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 문화,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다양성이 진정으로 꽃피우기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이 어떤 특별한 각오와 다짐과 용기 없이도 참여하고, 발언하고, 함께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스스로에게 ‘함께 가자’의 진정한 의미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할 이유가 아닐까.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