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9호] 커버스토리ㅣ인간 아닌 종에 대한 권리, 동물권
올해가 ‘개의 해’라지만, 이미 지난해부터 뉴스 타임라인은 여러 가지 ‘개 관련 뉴스’가 장식했다. 먼저 작년 초 탄핵된 전 대통령의 ‘퍼스트 도그’(first dog)였던 진돗개 아홉 마리 중 일부가 ‘혈통 보존 단체’로 분양됐다는 소식이 있었다. 여러 동물보호단체가 이에 우려를 표하며 인터넷을 달궜다. 후반기에는 유명 방송인의 애완견에게 물린 이웃사람이 숨지는 사건도 있었다. 한국의 애견 문화와 관련 법령에 관한 논쟁이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사람과 개가 함께 사는 법을 두고 쏟아지는 뉴스 와중에, ‘이게 사는 건가’라는 가축들의 목소리도 나왔다. 살충제 달걀 파동과 함께 전국 양계 농가의 열악한 실태가 드러났고, 닭뿐만 아니라 축산업 전반의 비위생적이며 비인도적인 동물 관리 실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커졌다. ‘유상복지’나 ‘무상복지’도 아닌 ‘동물복지’ 이야기까지. 사람들은 모처럼 동물의 권리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함께 가자’는 우리의 이야기에, 비로소 동물들도 낄 여지가 조금 생긴 셈이다.
우리는, 주인일까
밖에서 애완견에게 목줄과 입마개를 해야 하는지 아닌지, 중성화가 윤리적인지 아닌지, 내가 마트에서 산 달걀이 동물복지 농장의 달걀인지 아닌지. 그간 우리 입에 오르내렸던 이 모든 논쟁들은 유통기한이 길지 않다. 당장의 이슈가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고 차츰 소셜미디어와 뉴스 타임라인에서 사라지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내 복지’ 문제로 관심을 돌릴 것이다. 일련의 사태를 낳은 근본 원인에 대한 문제 제기는 그대로 뒤에 남겨진다. 사실 이렇게 잊혀질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진짜로 답해야 할 질문이다. 우리 인간은 이 지구의 주인인가. 지구상 모든 동식물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군림해도 괜찮은 것인가.
동물과 자연을 함부로 다루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이슈의 뒤에 있는 이 질문에 ‘예스’란 답을 던진다면 해법은 간단하다. 지금까지 쭉 그래왔듯, 터져 나오는 사 건들에 긴급 대책을 내놓고 인간에게 직접적인 해가될 수 있는 부분을 적절히 관리해 나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노’ 라면? 우리는 지구별의 수많은 손님 중 한 집단일 뿐이며, 손님으로서 같이 탄 다른 손님들의 평안을 배려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그때는 동물권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마주해야 한다. 동물권은 인류가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출발한다. 여기서 말하는 권리란 ‘인권의 부속 조항’ 같은 선언적 의미가 아닌, 인권과 동등한 가치와 권위를 지닌 권리다.
사유할 수 없다면 대우받을 수 없다
동물의 권리에 대한 논쟁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 시대 철학자들까지 가 닿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은 동물을 위해, 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동물이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반면 피타고라스는 동물을 인간의 정신적인 친척(kindered soul)이라 보았다. 그래서 주변에 채식주의를 적극 권했다. 동양의 사상은 동물이 받는 고통, 동물과 자연이 갖는 의미에 대해 더욱 구체적이며 실천적으로 사유했다. 유교는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언제나 중히 여겼고, ‘살생 금지’는 불교도가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원칙이다.
유사 이래 인류는 늘 동물을 사냥하고, 기르고, 거기서 많은 부산물을 얻어 의식주에 써 왔지만, 큰 틀에서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균형이 있었다. 가축이나 가축의 부가생산물의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일 방법이 없었던 인간에게 동물은 늘 ‘귀한 재산’이었다. 동물의 지위가 귀한 재산에서 값싼 자원으로 격하된 것은 근대 과학이 싹트면서부터였다. 지구의 당당한 주인으로 올라선 인류에게, 자신의 옆자리를 값싼 자원 따위에 내 줄 의사는 없었다. 동물과 자연은 인간이 소유하고 휘두를 수 있는 대상으로 격하됐다.
데카르트는 “생각할 줄 모르고 느낄 줄 모르는 동물은 기계와 다를 바 없는 것”이라 말했고, 로크, 홉스, 칸트 등도 ‘사유할 수 없다’는 이유로 동물에게 그 어떤 도덕적 지위도 부여하지 않았다. 방글라데시 치타공의 추나티 야생동물 보호구역 설립자인 술탄 하피즈 라흐만 박사는 “근대사회 및 산업혁명의 태동과 함께 발달한 ‘자연 대 인간’이라는 패러다임이야말로 향후 500여년 간 지속된 자연 파괴와 종의 멸절의 뿌리”라고 이야기한다. 생물학, 의학, 약학 등의 눈부신 발전도 동물의 ‘값싼 희생’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 고기나 가죽을 얻기 위한 조직적인 축산 과 도축 및 유통 시스템에서 동물은 정말로 기계같이 소비됐다.
동물을 한낱 자원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일찍부터 우려의 목소리를 낸 이도 있었다. 19세기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은 “생명체에게 기본권이 있는지 없는지 판별할 때 중요한 질문은 그 생명체가 ‘생각하거나 말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여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의미 있는 호응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에 와서였다. 사실, 그 전까지의 인간은 동물은커녕 같은 인간에게조차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기본권을 부여하는 것을 망설이는 존재였다.
확장할 수 있는 용기
현대 인류의 번영이 동물, 특히 가축의 희생 위에서 유지된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국제축산연구소(International Livestock Research Institute)의 2016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지구 전체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약 13억 명이 축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생계를 의지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농축산업 분야 GDP에서 축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40% 이상이고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아프리카의 우유 및 육류 소비량은 2050년까지 지금의 3배에 달할 것으로 보이며, 많은 개발도상국은 인구의 80%가 농축산업 종사자다.
이런 상황에서 가축의 생산, 유통, 소비 전반에서 동물의 권리를 외치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이란 비판을 받기 쉽다. 동물의 안녕을 신경 쓸수록 축산업의 효율과 생산성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소비 문화는 생산 분야에서의 효율과 생산성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수준이다. 다만 인류는 효율과 생산성의 논리를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무분별하게 적용할 때 착취로 귀결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효율과 생산성에 우선해 ‘인권’을 지키고자 노력하게 됐지만, 그 권리는 여전히 지구상 생명체 중 단 한 종, 호모 사피엔스에게만 적용된다. 여기서 ‘인권과 비슷하지만 인권은 아닌 것’으로 그 논의를 한 발 더 내딛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더 많은 양보와 합의도 필요하다.
보고 느끼고 행동하라
현재의 시스템을 최소한의 비용으로 효과적으로 바꿀 방법이 나오지 않는 한, 동물권 옹호 활동가들이 대중의 진지한 지지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여러 단체가 동물권에 대한 관심 이상을 촉구하는 이유는, 현 시스템에서 동물이 받는 고통이 감내할 만한 선을 훌쩍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도시의 소비자는 동물의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생각조차 해볼 틈이 없다. 생산자는 소비자가 예쁘게 포장된 계란과 우유, 그리고 식용 가축의 살덩이 앞에서 ‘고통’을 떠올리길 원치 않는다. 소비자 역시 거울 앞에서 자신이 바르는 화장품의 무해성을 증명하기 위해 희생된 동물의 고통을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지금 이 순간 수많은 동물들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 페타(People for the Ethical Treatment of Animals, PETA)나 그린피스 등 환경 및 동물보호 단체들은 점점 많은 사람이 그 고통을 인식하게 될 때 패러다임의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 믿는다. 꾸준한 소비 트렌드로 자리잡은 공정무역이나 공정여행에 대한 관심도, 소비자가 미처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동물보호 단체가 틈만 나면 퍼포먼스를 벌이고 고발을 멈추지 않는 이유다. 지난 2013년, 페타가 앙고라 토끼 털을 무자비하게 잡아뜯는 중국의 공장 모습을 찍어 폭로한 영상은 SNS를 통해 수백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비윤리적인 패션 업계의 생산 방식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세계 주요 패션 브랜드는 앙고라 제품 출시를 중단하기도 했다. 페타의 마케팅혁신부서장인 조엘 바틀렛은 당시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페이스북 덕분에 우리는 소비자에게 식용, 실험, 패션 및 공연용으로 활용되는 동물 착취 관련 사례를 1년 전보다 세 배나 많이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산업적 육류 농장의 송아지는 출생 직후 어미와 분리되어 자기 몸보다 그리 크지 않은 우리에 가둬진다. 송아지는 여기서 일생을 보낸다. 평균 약 4개월이다. 결코 우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며 걸을 수조차 없다. 이 모두가 근육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근육이 약해야 부드럽고 즙이 많은 스테이크가 된다. 이 송아지가 처음으로 걷고 근육을 뻗으며 다른 송아지들과 접촉할 수 있는 것은 도살장으로 가는 길에서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