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선진국들이 자국민 전체를 접종하고도 남는 코로나19 백신을 확보해 두고 일상 복귀를 서두르고 있는 가운데 대다수의 저개발국 국가들은 고통 속에서 자신들의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만 있는 중이다. 내 나라부터 먼저 챙기고 보자는 ‘백신 민족주의’ 앞에 ‘세계는 하나’라는 구호는 결국 순진한 희망사항일 뿐인 것일까? 지난 2월 국제생명윤리위원회(IBC)와 세계과학기술윤리위원회(COMEST)를 통해 평등한 백신 보급을 위한 연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유네스코는 지금이야말로 전 세계가 하나임을 증명할 때이며, 그렇게 해야만 기다리던 일상을 하루빨리 되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팬데믹 탈출의 좁은 문
어떤 의미에서 지난 2020년은 ‘전 세계가 하나’였던 시기였다. 뉴욕 맨해튼의 빌딩숲 사이에서도, 인도 뉴델리의 미로 같은 슬럼가에서도, 사람들은 똑같이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병상 부족에 시달렸으며 목숨을 잃었다. 물론 바이러스의 확산 양상은 차별적이었다. 바이러스는 한 국가나 지역 내에서도 계층별·소득별로 차이를 두고 확산됐다. 하지만 강대국부터 저개발국까지, 지구상 어디든 보건 위기와 경기 침체를 함께 겪지 않은 곳은 없었고, 모두가 인류의 위기라는 말에 공감했다.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아닌 ‘연대’라고도 입을 모았다.
바이러스의 위력 앞에 잔뜩 움츠렸던 인류는 지난해 말부터 백신을 내세워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각국의 전폭적인 행정적·재정적 지원 아래 전례 없는 속도로 백신들이 개발됐다. 속전속결로 백신 접종을 진행한 선진국에서는 확진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현대 과학기술의 위력과 가능성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과학이 코로나19에 대항할 가장 확실한 무기를 내놓자 유네스코를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들은 한 목소리로 ‘윤리적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인공지능(AI)이나 유전자 가위라는 신기술이 주목받을 때도 그랬듯, 이들은 과학의 눈부신 성과는 그것을 개발한 일부 국가나 기업의 이익만이 아니라 전 인류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신이 국가별로 또다른 차별을 낳도록 방치하는 대신, 팬데믹 탈출의 문을 전 인류가 함께 열고 나가자는 주장이다.
전 세계적으로 백신 확보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던 지난 2월 10일, 유네스코 국제생명윤리위원회(IBC)와 세계과학기술윤리위원회(COMEST)는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고 백신의 공평한 보급을 위한 전 세계의 연대를 촉구했다. 생명윤리 및 과학기술윤리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자문기구인 IBC와 COMEST는 “백신 수혜자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윤리가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백신 보급에 있어 자국 국민의 안전만을 우선시하는 ‘백신 민족주의’의 확산에 우려를 표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Tedros Adhanom Ghebreyesus) 사무총장도 “지구상 모든 곳에서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 코로나의 위험은 끝난 것이 아니”라며 공평과 연대의 가치를 강조한 두 위원회의 공동성명을 환영했다.
면역의 불평등한 우선순위
유네스코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국제기구들은 백신 보급이 본격화하기 이전부터 백신 불평등 해소를 위한 행동을 촉구해 왔다. WHO와 세계백신연합(GAVI) 등은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를 설립하고 더 많은 국가들로부터 자금 및 백신 지원을 받는 한편, 이를 중-저소득 국가들을 중심으로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한 체계를 만들었다. 물론 평등한 백신 보급 노력을 기울여야 할 주체는 특정 국가가 아닌 ‘모든 인류’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응답할 수 있고, 또 응답해야 하는 사실상의 주체는 백신 개발 및 생산을 주도하고 있는 선진국이며, 이들 국가는 안타깝게도 백신 보급 초기에 이같은 요구에 충분히 호응하지 못했다.
미국의 보건정책 관련 비영리기구인 KFF(Kaiser Family Foundation)가 세계은행 등의 자료를 취합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지난 3월 기준으로 전 세계 성인 인구의 19%가 속한 고소득 국가들은 전체 백신의 54%를 구매한 반면, 44%의 성인이 속한 중하위 및 저소득 국가들은 불과 15%의 백신만을 구매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고소득 국가들은 성인 한 명당 약 2.5회분의 백신을 확보했지만, 그 외 국가들의 성인들에게 돌아갈 백신 접종은 0.4회분도 채 되지 않았다. 4월 9일에는 테워드로스 WHO 사무총장이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7억 회의 백신이 접종되었지만 그 중 87%가 부유한 나라에서 이루어졌고 저소득 국가는 전체 접종 숫자의 0.2%만을 차지했을 뿐”이라 지적하고, “지금 코백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백신을 분배하는 방법이 아니라 분배할 백신을 확보하는 것”이라며 백신을 선점한 국가들에게 평등한 백신 분배 노력을 촉구한 바 있다. 이후 약 2개월 동안 전 세계의 백신 접종 숫자는 더욱 가파르게 상승했음에도 이들 저소득 국가의 백신 수급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지난 6월 6일 『NPR』(미국 공영라디오)이 존스홉킨스대의 발표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4월까지 7억 회였던 전 세계 누적 백신 접종 횟수는 6월 초 약 20억 회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프리카 각국을 비롯한 주요 저소득 국가들에게 이는 남의 일일 뿐이다. 『NPR』은 “시에라리온이 확보한 백신은 지난 3월 8일에 코백스를 통해 전달받은 10만 회분이 마지막이었다”며, “그나마 아프리카에서 상황이 낫다는 남아공이나 케냐에서조차 인구 대비 백신 접종 비율은 2%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우리 먼저’의 값비싼 비용
그러는 사이에 올해 전 세계 코로나19 사망자 수는 188만 명에 달해 이미 지난해 전체 코로나19 사망자 수를 넘어섰다. 6월 초 『월스트리트저널』은 존스홉킨스대의 이같은 발표를 전하며 “부자 나라에서 백신이 바이러스를 물리치고 있지만 지구촌의 팬데믹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보도했다. 프로 야구와 농구 경기가 열리고 있는 미국의 경기장에서는 이제 마스크도 없이 만원 관중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가운데, 지구상 절대 다수의 국민들은 자기 차례의 백신이 들어올 때까지 그저 목숨을 걸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백신 개발과 유통에 들어간 막대한 자금과 기술 등을 감안할 때 각국 지도자들이나 백신 개발사가 평등한 백신 분배를 우선적으로 선택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기구와 전문가들이 끊임없이 백신의 평등한 공급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팬데믹을 가장 빨리, 그리고 최소한의 피해 규모로 종식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백신 개발과 접종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팬데믹 종식의 가장 큰 위험요소는 바로 변이 바이러스다. 변이는 바이러스가 증식하고 전염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므로, 지구 어디에선가 바이러스가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겨다니는 한 더욱 감염력이 강하고 백신에 저항력을 가진 변이가 나타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국가별로 순차적으로 바이러스를 물리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든 국가들이 동시에 백신을 통한 바이러스 퇴치에 나서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코백스 퍼실리티의 주요 파트너인 유니세프의 헨리에타 포어(Henrietta Fore) 총재는 지난 5월 “(백신 민족주의는) 공정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현명하지도 않다”며 “어딘가에 남아있는 위협은 어디에나 남아있는 위협”이라고 꼬집은 바 있다. 백신 접종과 진단검사, 치료 중 어느 하나라도 구멍이 뚫린 곳이 남아있는 한 바이러스는 그 구멍을 통해 들불처럼 번져나갈 수 있으며, 전문가들은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팬데믹의 새로운 장(章)이 다시 시작된다는 뜻”이라고 경고한다.
백신의 불평등한 공급은 전 세계가 팬데믹으로 촉발된 경제 위기로부터 회복하는 데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촘촘한 공급망과 소비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는 오늘날의 세계 경제는 바이러스가 지구상 모든 곳에서 통제 가능한 상태가 되어야만 완벽히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유럽 랜드연구소(RAND Europe)는 『코로나19와 백신 민족주의의 대가』(COVID-19 and the Cost of Vaccine Nationalism) 보고서를 통해 팬데믹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대면 서비스 업종이 전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근거로 백신 공급 시나리오에 따른 향후 코로나19 피해 규모를 추산해 보았다. 보고서는 전 세계가 평등하게 백신을 보급받고 함께 집단면역을 달성하는 시나리오를 기준으로 백신이 주요 국가 그룹별로 차등적으로 보급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추가 손실 규모를 산정했는데, 저소득 국가가 백신 공급에서 소외되는 시나리오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매년 1530억 달러(최소 490억 달러에서 최대 2300억 달러)의 추가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그 중 1190억 달러의 손실이 주요 백신 생산국들인 인도, 중국, 러시아를 포함한 선진국 및 고소득 국가에서 발생할 것으로 추정했다. 보고서는 “옥스팜(Oxfam)이 전 세계 저소득 국가에 백신을 보급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으로 예측한 금액이 250억 달러”라며, 따라서 “지금 저소득 국가의 백신 공급을 위해 1달러를 투자할 때마다 인류는 약 4.8달러(최소 1.9달러에서 12.6달러)의 이득을 기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포용이 곧 과학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방역 모범국들과 대량의 백신을 확보한 선진국들은 각 나라 안에서 과학에 근거한 전략을 세우고 백신 접종을 해 나가고 있다. 백신이 무한정 공급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것만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상황을 전 지구 단위에서 바라보았을 때, 지금 인류는 백신을 취약계층과 고위험 집단이 아닌 부자(나라) 집단에 우선적으로 공급해 오고 있으며, 이 불평등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는 충분히 들리지 않는다. 유네스코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소외된 국가들이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지난 4월 4일 ‘코로나19 백신의 윤리적 고려사항’ 워크숍을 온라인으로 열고 백신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할 방법을 논의한 바 있다. 이 자리에서 피르민 에두아르 마토코(Firmin Edouard Matoko) 유네스코 사무총장보는 “유엔 시스템뿐만 아니라 지역 단체와 관련 시민사회가 연대해 변화를 위한 목소리를 내고, 회원국 내에서 더 많은 정책적 논의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 역시 지난해 기사에서 “정치가 아니라 과학에 근거한 잘 조율된 전략이 필요하다”며 자국내 정치적 득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결정하도록 내버려두기보다는 과학에 바탕을 둔 전 지구적 전략을 수립하고 시행함으로써 지구상 가장 취약한 계층의 감염 위험을 먼저 줄여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정된 자원으로 팬데믹을 가장 효과적으로 탈출하기 위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과학적이며 탈정치적인 해결책이 바로 포용이기 때문이다.
지난 6월 19일, 국내외 언론들은 일제히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델타 변이’가 엄청난 전염력을 바탕으로 지배종이 될 것”이라는 WHO의 기자회견을 전하며 전파력이 40-60%나 더 강력한 해당 변종의 확산을 경고하고 나섰다. 인구 절반 이상이 백신 접종을 마쳐 일상 복귀를 눈앞에 둔 것으로 보였던 영국에서는 6월 중순부터 확진자가 다시 폭증했고 그 대부분이 델타 변이 바이러스 감염 때문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내 나라 먼저’라는 목표 아래 숨가쁘게 펼쳐진 부자 나라들의 백신 접종 앞에서 주춤하는 듯했던 바이러스는, 이렇게 남겨져 있는 틈을 통해 다시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1년 반 동안 우리 모두가 경험했듯 바이러스는 아주 작은 틈만으로도 언제든 다시 우리 일상을 집어삼킬 수 있다. 저소득 국가의 수십억 명이라는 커다란 틈을 내버려둔 채 일상 복귀의 달콤한 꿈을 꾸는 우리에게, 그 틈을 틀어막을 수 있는 시간은 어쩌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참고자료]
· RAND Corporation 『COVID-19 and the Cost of Vaccine Nationalism』(2020)
· kff.org “Global COVID-19 Vaccine Access: A Snapshot of Inequality”(2021)
· npr.org “Vaccine Rollout Remains Highly Uneven Worldwide”(2021)
· un.org “Low-income Countries Have Received just 0.2 per cent of All COVID-19 Shots Given”(2021)
· unesco.org “Making COVID-19 Vaccine a “Global Public Good” for Its Timely Allocation to Africa”(2021)
· unicefusa.org “How to End a Pandemic? Vaccinate the World”
· wsj.com “Covid-19 Deaths This Year Have Already Eclipsed 2020’s Toll”(2021)
· hbr.org “The Danger of Vaccine Nationalism”(2020)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