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을 위한 제도의 이면
정치권에서부터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여러 조직은 이른바 ‘청년’들을 품기 위한 다양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청년들의 참여를 돕는다는 이들 제도는 그 취지를 제대로 살리고 있을까? 청년을 위한 진정한 정책보다는 청년이라는 이미지만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안면이 없는 사람이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해 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 프로필을 확인하곤 한다. 그러다 보면 정말 화려한 이력을 가진 청년을 만나게 된다. 소위 ‘청년’과 관련된 각종 조직에서 활동했다는 내용들이다. 이러한 청년들이 다수 나타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청년참여’를 제도화하는 각종 법과 조례, 기구,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추세가 있다. 청년의 목소리를 듣고 이들을 참여시키고자 하는 주체들의 등장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따라붙는 것도 사실이다. ‘청년의 참여를 폭넓게’라는 구호가 아래로부터 조직된 활동의 맥락에서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제도화되는 차원에서 쓰일 때 민주적이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청년 참여의 민주주의적 가치가 사회적으로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채 제도와 사업이 먼저 모습을 드러낼 때, 청년참여 프로그램 역시 기존 사회의 위계화된 질서를 답습할 우려가 있다.
청년기본법 시행을 앞두고 조직 과정에 있는 국무총리실 산하 청년정책조정위원회 및 청년정책추진단 청년참여단의 청년위원 위촉 과정은 그러한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서류제출과 면접을 거쳐 위원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결국 정부가 적격·부적격을 심의하는 모양새가 만들어졌고, 위원 활동의 자격이 소위 ‘스펙’이나 ‘스토리’가 있는 청년에게만 주어진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결국 청년의 참여는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성취해야 할 경쟁의 대상이 된 셈이다. 따라서 청년위원이라는 참여제도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다른 동료 청년시민을 대의하는 ‘역할(role)’보다는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경력’의 기능을 하게 될 개연성도 커졌다. 한정된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경쟁은 개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조직과 정당정치의 차원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청년 관련 직함만 수십 개씩 가지고 있는 개인들은 오히려 ‘청년참여의 실패’를 드러내는 증거일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경쟁이 결국 ‘시민이 정부의 실질적인 주인이어야 한다’는 정부 권력에 대한 민주주의적인 사유를 방해하고 불능 상태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청년정책조정위원회 위원 위촉 과정에서 놀랍게도 청년위원과 비청년위원의 위촉 과정이 달랐다. 공식적인 선발 과정이라는 경쟁을 거친 청년들과 달리, 비청년위원은 섭외를 통해 위원을 위촉하는 전통적인 절차를 따랐다.
청년참여기구에서 청년들의 참여를 청년정책이라는 좁은 범주로만 제한하는 것도 문제다. 50대에게 50대를 위한 정책만 고민하라고 하지 않듯이, 청년시민에게도 모든 의제에 대한 참여와 제안의 기회가 열려 있어야 한다. 심지어 ‘서포터즈’와 같은 이름으로 기업의 비용을 젊은이들에게 전가했던 그 방식이 정부의 청년참여 프로그램에서 반복되기도 한다. 정책설계나 관계자 커뮤니케이션, 문서나 회계 실무와 같은 일이 청년 참여자들에게 사실상 강제되지만 합당한 비용이 책정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력만 쌓으면 그만인 지원자뿐만 아니라 진정한 참여 기회에 목마른 청년조차 이러한 비합리적인 청년 차별에 직접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기는 어렵다. 다른 청년을 참여시키면 그만이라고 정부가 이미 생각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청년 대부분은 ‘청년팔이’라는 말이 상기시키는 불합리함에 대해 반응하고, 함께 분노한다. 그러나 막상 청년이라는 이름을 동원하여 ‘시민’의 값과 지위를 낮추는 사업에 스스로 동원되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너무나 쉽게 빠진다. 사회의 구조는 이미 청년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져 있지만, 기울기를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서는 그 내부로 들어가 새로운 힘을 가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청년의 참여를 확장해야 한다는 구호는 정치 권력이나 기회의 세대 간 불평등이라는 맥락 이전에, 기본적으로 ‘대표자’와 ‘대표되는 자’ 사이의 불균형에 균열을 내고자 한다는 측면에서 그 정당성을 갖는다. 현재의 정치적 대의 체계가 스스로를 청년이라고 선언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충분하게 담아내지 못하고 있기에, 이를 보완하기 위한 대안적인 참여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세간의 오해와 달리 특정 연령층에 국한된 청년들이 자기 세대만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겠다는 집단 이기주의가 결코 아니다. 청년의 참여는 만19세에서 34세까지의 청년 중 ‘그럴듯한 청년’을 골라 채울 때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청년 관련 제도에 참여하는 청년 스스로는 물론이고, 이러한 제도를 설계하고 실제 운영하는 담당자들도 좀 더 어려운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을 게을리할 때, 우리는 ‘청년참여’라는 말을 팔아 사회의 비민주성을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일에 자신도 모르는 새 공모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선기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