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민 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협력사업본부장
한국의 청년 및 학생 활동이 민주화운동과 같은 우리 사회 변화의 흐름으로부터 적잖은 영향을 받았듯,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이하 한위)의 청년 분야 사업도 시대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한위 청년사업의 출발부터 함께하며 여러 변곡점을 직접 경험했던 전성민 전 협력사업본부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창설 이후 교육, 과학, 문화 분야를 중심으로 사업을 진행해 오던 유네스코가 60년대부터 청년 분야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1950년대에 유네스코는 ‘신생활교육’을 주창하고 다양한 사업을 펼칩니다. 1954년 과테말라의 사례를 벤치마킹하여 추진된 우리나라의 유네스코학생건설대 활동도 이의 일환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설립 초기부터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관심과 역량을 축적해 온 유네스코에 유엔은 1960년 청년에 대한 지원방안을 요청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나타나는 청년문화의 변화에 정부 간 기구 차원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컸던 것이죠. 청년에 대한 유엔과 유네스코의 이러한 관심과 노력은 1964년 세계청년전문가회의의 결과보고에 기초하여 1965년 12월 유엔의 「청년의 평화이념 및 국민 간 상호존중과 이해의 증진에 관한 선언」 채택으로 이어집니다. 이 선언문은 “청년을 국제적 이해와 협력 및 평화의 정신으로 교육하기 위한 유네스코의 역할과 기여를 인식”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985년 유엔이 정한 ‘세계청년의 해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등, 유네스코가 유엔 시스템 내에서 청년정책과 사업을 담당한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위의 청년사업도 그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1964년 13차 유네스코총회에서 「청년활동지원에 대한 권고안」을 채택하고 1965년 3월에는 ‘아시아지역청소년전문가회의’(동경), 1965년 5월 ‘청소년문제연구협의회’(춘천) 등 지역과 국가차원에서 권고안 추진을 위한 회의들이 잇따라 개최됩니다. 1960~70년대 한위의 청년사업을 돌이켜보면, 여섯 개 항의 총회 권고안을 근거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권고는 각종 비정부 청년단체의 활동을 지원하고 적절한 조치와 활동을 개발하라는 것입니다. 이 권고에 따라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가 만들어졌는데, 초창기에는 사무실도 한위가 제공해 유네스코 회관에 두었습니다. 두 번째 권고는 청소년들이 사회생활과 직업생활에 보다 효과적으로 참여하고 여가를 창조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근거로 진행했던 사업이 유네스코학생회 활동지원과 근로청소년연수과정 등입니다. 청년지도자 및 교육자의 훈련 강화를 요청한 세 번째 권고에 따라 한국청소년활동지도자연수가 진행됐고, 청년활동에 필요한 건물과 시설 확충이라는 다섯 번째 권고를 바탕으로 경기도 이천에 유네스코청년원이 만들어졌습니다. 정부 역시 유네스코의 권고를 근거로 하여 청년원 건립과 운영을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청년원에서는 청년활동에 관한 각종 자료를 수집·출판·보급했고, 『새물결』이나 『보람있는 대학생활』, 『학생문화연구』, 『유네스코클럽지침서』 등을 발간해 청년활동 관련 정보수집과 제공의 중심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권고는 각국 국가위원회 내에 청년활동을 위한 특별기구를 설치하는 것으로, 이에 따라 학생활동지도교수협의회가 설립되었습니다. 훗날 국무총리, 대학총장 등을 역임하셨던 이영덕, 현승종, 정원식, 이기영 교수님 등이 모두 이 협의회에 참여하셨습니다.
한국 청년활동에서 유네스코청년원의 역할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청년원에서 진행한 연수사업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청소년활동지도자를 위한 연수였습니다. 이 연수과정은 청년활동지도자를 위한 체계적인 훈련프로그램이 드물었던 70년대에는 획기적인 시도였고, 유네스코청년원은 청년과 청소년활동의 중심으로 전국적인 유명시설이 되었습니다. 프로그램들이 유네스코나 유엔이라는 국제네트워크에서 제공되는 새롭고 풍부한 정보와 가치, 협업체계를 활용하여 개발됐다는 점도 청년원의 위상을 높인 또다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1980년대에 들어서는 유네스코뿐만 아니라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ESCAP) 같은 유엔 산하기구에서도 아태지역의 청년활동을 추진할 때는 파트너 기구로서 유네스코청년원을 가장 먼저 꼽을 만큼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위가 펼친 청년활동이 국내의 여타 청년 관련 사업과 구분되는 지점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가 1991년 유엔에 가입하기 전까지 유네스코는 국제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창구였습니다. 구소련과 수교를 맺기 전인 1977년에 소련을 공식 방문한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김규택 사무총장의 근황이 각 일간지에 대서특필된 사실만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우리나라의 국제화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자연히 유네스코 이념을 보급하기 위한 한위의 활동들은 큰 사회적 지지와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청년의 국제활동이라는 부분 외에 특정한 단체나 기관의 설립목적이나 정책, 그리고 종교적·사상적 배경에 치우치지 않고 청년사업을 펼쳤다는 점도 한위 청년사업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정부단체나 종교법인, 공공기관 등 당시에도 청년활동을 하는 단체나 기관들이 많이 있었지만, 한위는 특별한 이해관계 없이 청년에 초점을 맞춘 사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국내 청년활동 분야에서 중추적인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특정 단체나 정부의 입김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주도적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펼치도록 해 주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네스코학생회(KUSA)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청년들의 주도적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KUSA는 청년활동역사에서 모범적인 사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한위가 KUSA의 설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KUSA는 한위보다는 당시 유네스코활동에 참가했던 청년대학생들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리라 생각합니다. 한위는 KUSA 사업을 추진하면서 ‘청년의 주도성’, ‘청년의 대표성’, ‘청년의 국제성’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고, 학생회를 지원하되 통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유네스코 학생활동이 시작된 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청년의 주도성, 대표성 강화가 논의되는 것을 보면 새삼스럽게 유네스코 청년활동이 상당히 앞서갔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현대사를 되돌아보면 청년들의 활동에서 민주화 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았습니다. 자연히 권위주의 정부와 청년 간의 관계에 따라 한위의 청년 사업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1970년대에 이른바 황금기를 구가했다고 할 수 있는 한위의 청년사업이 1980년대로 이어지지 못한 배경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1970년대까지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정부의 청년, 청소년 정책의 파트너로 일정 부분 인정을 받았고 소통도 활발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폭압적으로 진압되면서 청년과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제5공화국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정권 차원에서도 이들의 시위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60-70년대 학생운동이 어느 정도 정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삼선개헌을 반대하고 여러 가지 정책들을 비판했던 것과는 질적으로 달라진 것이죠. 이러한 변화에 따라 한위와 KUSA의 청년활동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1년에는 서울의 한 대학 KUSA 신입생 배움터에서 당시 정부가 금서로 지정한 도서를 읽고 토론을 했다는 이유로 유네스코청년원장이 해직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한위가 청년사업 초기부터 어렵게 유지하여 왔던 청년의 주도성과 대표성의 보장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는 정치·사회적 변화를 설명합니다. 정부와 청년 사이에서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설 자리가 좁아진 것이지요. 이후 1982년 제5공화국 정권의 학원녹화사업을 기점으로 청년활동 지원부서인 협회과의 부서장과 대학생활동 담당간사가 인사조치 되는 등 청년사업이 심각하게 위축됩니다. 이 시기 청년활동은 비단 한위만의 문제라기보다는 국가 차원에서 청년정책의 심각한 후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말 해외여행의 자유화와 함께 청년원의 국제활동 역량이 인정받으면서 한국청년해외봉사단 등 청년의 국제활동이 점차 활성화되었고, 1990년대 본격적인 세계화 바람을 타고 ‘국제자원활동’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청년사업이 날개를 달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를 통과하면서 얻은 KUSA의 내상과 한위와의 신뢰관계 손상은 너무 심각해서 아직도 복원이 덜 된 상태입니다.
끝으로 한국의 유네스코 가입 70주년을 맞아, 향후 우리나라의 청년 분야 활동에서 한위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청년정책과 사업은 청년의 전반적인 삶을 대상으로 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교육, 과학, 문화, 정보·커뮤니케이션 등 유네스코가 다루는 주요 이슈들이 모두 청년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년사업이라고 해서 청년 이슈만을 따로 분리해서 다룰 필요도,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뜻이지요. 예전에는 유네스코가 다루는 이슈가 너무 넓다는 것이 불리하다는 시각도 있었지만, 바야흐로 융합 사회를 맞아 청년사업을 추진하는 데 있어 유네스코 사업의 다양성은 큰 자산이자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년사업은 무엇보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핵심입니다. 기획과정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추진과정에서 청년들에게 보다 많은 참여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또한 여전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갈증을 느끼는 부분 중 하나가 국제활동 경험이라고 봅니다. 경제적, 사회적 여유와 환경이 마련된 청년들은 국제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만 여전히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위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국제적인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또 굳이 해외를 나가지 않더라도 세계시민의식과 역량을 함양할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청년들이 좀 더 넓은 마당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판을 만들어주고, 그 안에서 만나게 되는 새로운 만남과 관계 속에서 감동을 얻고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사업 분야와 네트워크를 활용한다면 그러한 부분에서 새로운 실험과 도전이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인터뷰 진행 및 정리
과학청년팀 김은영 팀장, 김명신 선임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