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웅재 씨가 작사 작곡해 많이 애창되고 있는 노래 ‘소원’의 구절 중에 ‘저기 높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내가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 누군가의 길을 비춰 준다면⋯’이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 바로 이렇게 정의될 수 있는 기술이다.
적정기술이란, 저기 선진국과 강대국들이 추구하는 첨단기술이라는 높은 산이 아니라, 후진국에 살고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기댈 수 있는 오름직한 동산처럼 작고 간단하고 자본이 적게 들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스스로 꾸려 볼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멋지고 빼어난 첨단 기술이 그것을 향유하는 개인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자랑이 되어 미래를 비추어 주는 기술이라면, 적정기술은 함께 나누며 서로의 길을 비추는 작고 아름다운 인간의 얼굴을 가진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적정기술의 개념은 1960년대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가 만들어낸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라는 용어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슈마허는 세계적 빈부 양극화 문제를 고민하던 중 간디의 자립경제 운동에서 영감을 받아, 저개발국의 개발 성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중간 규모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슈마허에게 이러한 영향을 준 간디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에서 들여오는 값싼 대량 생산 작물로 인해 인도의 면직 산업이 침체되는 것을 우려해 자립 경제 운동을 펼치며 스스로 물레를 돌렸다. 이러한 이유로 간디를 적정기술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 활동가들은 ‘중간’이라는 용어가 미완의 기술 혹은 첨단기술보다 열등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적정기술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적정기술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붐을 일으켰다. 당시 제3세계에 대한 공적 원조에 있어 과학기술의 중요성과 효용성이 부각되면서 적정기술 전수를 위한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슈마허는 1966년 직접 중간기술개발집단(Intermediate Technology Development Group, ITDG, 현재의 Practical Action)을 설립하고 그 활동을 이끌었다. 미국에서도 정부 차원의 적정기술 관련 기관과 부서가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인 예가 1976년 카터 행정부가 설립한 국립적정기술센터(National Center for Appropriate Technology, NCAT)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적정기술이 당시 제 3세계의 경제구조가 야기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더 큰 변화는 『빈곤으로부터의 탈출』(Out of Poverty)의 저자인 폴 폴락(Paul Polak)이 ‘적정기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폴락은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기술은 기술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면서 그동안 기술 설계 과정에서 고려되지 않았던 소외된 90%의 빈곤 계층을 자선과 기부의 대상이 아니라 고객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그때까지 개발 보급된 많은 적정기술 제품들은 현지에서 지속 가능하게 활용되지 못하고 한두 번 쓰고 버려지거나 창고에 처박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적정기술 개념에 대한 정의와 평가는 제3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원조 활동에서 기술이 차지하는 위치, 기술의 정의와 기능, 기대효과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전 간디 시절과 달리 현재의 지구촌 오지들은 비록 교통이나 통신에 다소의 어려움이 있기는 해도 분명 첨단기술을 목도하고 있고, 또 직접 활용하는 등 첨단 과학기술 문명에 매우 가까운 주변부에 와 있다는 사실이다. 중남미 오지 부족의 족장이 무선전화기를 사용하는 것이 지금 지구촌 오지의 현실이다. 따라서 일부 지역에서는 (최신 기술 트렌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적정기술이 배척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정기술이 지구촌의 가난하고 소외된 90%을 위한 대안 기술이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특히 2000년대 들어 유엔을 중심으로 국제사회에서 추구하고 있는 지속가능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개념은 후진 개발도상국에 등장하고 있는 개발과 보존의 균형, 그리고 환경적, 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이슈와 잘 부합되고 있기 때문이다.
간디가 물레를 돌리던 시절의 적정기술을 ‘적정기술 1.0’이라고 한다면, 폴 폴락의 지적으로 한 단계 도약한 적정기술은 ‘적정기술 2.0’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지구촌 제3세계의 어려운 이웃이 요구하는 ‘개발과 보존의 균형 속 지속가능발전’을 주도해야 할 기술은 바로 ‘적정기술 3.0’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는 이 역시 ‘적정기술 4.0’과 ‘적정기술 5.0’으로 진화해 나갈 것이라 믿는다.
김용수 국경없는과학기술자회 회장, 한양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