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해 ➌
우리 모두의 아픈 기억이자 역사를 바로 알리기 위한 소중한 기록물인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노력은 일본의 강력한 방해에 직면해 있다. 기록물의 등재 노력을 함께 이끌어 온 신혜수 단장은 연재 마지막 순서로 인류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위안부’ 기록물을 비롯한 인권기록물이 갖는 의미를 전한다.
2014년 말에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우리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 생존피해자의 수가 매년 줄어드는 상황에서 그저 일본이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을 스스로 내놓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판단이 들었고, 할머니들의 증언을 비롯한 ‘위안부’ 기록물이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해서 역사교육과 인권교육, 평화교육에 활용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이 일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더불어 1990년대 초부터 함께 운동을 펼쳐 오면서 유대감을 쌓은 외국 단체들과 힘을 합친다면 좀 더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첫 1년 동안 집중했던 부분은 우선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 사업을 파악하고, 각국 단체들과 연락하면서 국제연대위원회를 조직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모르고 있었던 사실들도 알게 되었다. 그 첫 번째는 우리나라가 그간 세계기록유산 분야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국제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다른 나라의 기록유산 보존에도 긴요한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네스코에서는 2004년 이후 우리나라 주도로 기록유산 분야에 기여한 단체나 개인에게 수여하는 직지상이 제정·운영돼 오고 있으며,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매년 워크숍을 개최해 다른 나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돕기 위한 노력을 펼쳐오고 있다.
또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현재까지 등재된 세계기록유산 중에는 인권기록물도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나라는 뉴질랜드인데, 1893년 당시 뉴질랜드 성인 여성의 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청원한 ‘여성 참정권 탄원서’가 1997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다. 도미니카공화국과 자메이카 등 중남미 카리브해 7개국이 영국과 공동으로 신청해 2009년 등재된 ‘영국령 카리브해 지역의 노예 명부’ 또한 중요한 인권기록물이다. 이 자료는 19세기 초 당시 아프리카에서 잡혀와 대서양을 건너 중남미로 강제 이주된 흑인들의 노예무역과 노예노동의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다.
이러한 인권기록물의 존재는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사례였지만,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면서 우리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세계기록유산 사업에 드리우고 있는 그늘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본이 과거의 인권침해 역사를 숨기기 위해 어떻게 자국의 경제·정치·외교력을 이용하는지, 그리고 유네스코가 이러한 압력과 로비 앞에 재정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얼마나 취약한지를 가까이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신청한 ‘난징 대학살 기록물’이 2015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을 기화로 일본 정부는 세계기록유산 사업의 제도 개혁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분담금 납부 지연전략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결국 일본 주도로 새로 마련된 세계기록유산 등재 절차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등재신청물의 경우에는 관련국 정부가 개입해서 등재를 저지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특히 등재 심사과정에서 특정 회원국이 신청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경우 관련 당사국들이 무기한 ‘대화’를 하도록 개정된 부분은 사실상 특정 회원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문제적 기록물의 등재를 공식적으로 막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유럽연합 등 소위 인권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조차 일본의 입장에 동조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지구 곳곳에서 식민지를 경영했던 당사자로서 과거 자국이 벌인 인권침해 기록물의 등재가 제기될 가능성을 사전 차단하겠다는 포석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인류가 보존하고자 하는 기록유산은 말할 것도 없이 미래의 세대를 위한 것이다. 긍정적인 유산은 자부심을, 부정적인 유산은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국제인권법을 비롯한 다양한 협약이 있음에도 여전히 수많은 여성들이 온갖 종류의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었던 고초와 그들의 증언,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증거로서의 여성운동과 인권운동의 역사적 기록물이 갖는 의미는 지대하다.
유네스코 헌장에는 “정의, 법의 지배 및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보편적인 존중을 조장하기 위하여 교육, 과학, 문화를 통한 국가간 협력을 촉진”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지금 세계기록유산 사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과연 그 헌장에 부합되는 것인지 필자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등재를 방해하기 위해 ‘맞불 신청’을 한 일본 우익단체와의 대화를 중재키로 한 유네스코의 결정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기다려야만 하는 것인가. ‘위안부’ 기록물의 등재 여부는 유네스코가 지금까지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 설립 목적을 지켜나갈 수 있을지를 판단하는 가늠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위안부’ 기록물이 끝내 등재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국 정부는 전 세계의 ‘위안부’ 기록물을 유지·보존할 아카이브를 따로 구축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이 기회를 빌려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다. 2015년 말 소위 한·일 ‘위안부’ 합의로 박근혜 정부로부터의 모든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영문신청서의 교정을 비롯해 등재신청을 위한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고, 이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아울러 국제연대위원회가 지금도 계속 진행하고 있는 등재청원 서명운동(www.voicecw.org)에도 국내외의 많은 참여가 있기를 기대한다.
신혜수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