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에게 있어 때론 자식과도 같고 때론 목숨과도 같은 연구 성과를 누구에게나 개방하고 공유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만 알고 있는 비법’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연구의 동기를 앗아가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함께 고민해야만 풀 수 있는 숙제’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는 한 줄기 빛일 수도 있다. 인류가 기후위기를 비롯한 거대한 숙제들과 지속가능발전이라는 과제를 함께 안고 있는 지금, 유네스코는 오픈 사이언스(open science)야말로 과학계가 이 지난한 과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되리라 믿고 있다.
개방과 협업으로 팬데믹에 맞선 과학계
인류가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질병과 맞닥뜨린 지도 어느덧 1년째. 전 세계는 여전히 기록적인 수의 확진자를 쏟아내며 전염병과의 싸움을 힘겹게 벌이고 있다. 한 가지 희망적인 사실은 과학자들과 제약회사들이 머지않아 코로나19 백신 보급이 시작될 것임을 공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망 대로 몇 달 안에 백신이 상용화된다면 코로나19 사태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새로운 질병을 이겨낸 사례이자, 전 세계가 오픈 사이언스(open science)를 통해 위기 극복의 계기를 마련한 중요한 사례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 발간된 코로나바이러스 정책 대응 보고서에서 OECD는 “2002년 사스(SARS)가 창궐했을 때 과학계가 바이러스의 전체 유전자 염기서열을 분석하는 데 5개월이 걸렸던 반면,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이후 같은 일을 하기까지는 불과 한 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밝히며, 이는 전 세계 117개 과학 및 보건의학 관련 조직들이 오픈 사이언스에 참여해 데이터와 연구 자료를 공유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이처럼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항하기 위한 전 세계 과학계의 전례 없는 개방 및 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유네스코는 이것이 한시적 협력으로 그치지 않고 과학계의 항구적이며 전면적인 인식 전환과 정책 마련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오는 2021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오픈 사이언스 권고’(Recommendation on Open Science) 채택을 이끌어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유네스코는 그 일환으로 10월 27일 세계보건기구(WHO) 및 유엔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OHCHR)와 함께 오픈 사이언스 권고에 대한 지지 촉구 선언문을 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오드리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국가 및 연구자 간 불평등을 야기하며 전체가 아닌 일부에게만 과학적 진보의 혜택이 돌아가게 만드는 기존의 폐쇄적 과학 모델은 이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지적하고, “이번에 과학계가 보여준 연대는 여러 위기에 맞닥뜨린 인류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취해야 할 미래의 모델”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과학계와 시민사회, 민간 기업 등이 머리를 맞댄 지금이야말로 오픈 사이언스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할 최적의 시기”라고도 강조했다.
‘모두를 위한 과학’으로의 전환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보여준 사례처럼 오픈 사이언스는 과학 연구에 있어 다양한 계층의 협력과 과학 지식의 개방 및 공유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경쟁 기업 혹은 단체 간의 전략적 제휴나 새로운 공유경제모델의 한 형태로 바라보는 것은 오픈 사이언스의 개념을 지나치게 좁게, 그리고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네스코가 전 세계의 지지와 참여를 호소하고 있는 오픈 사이언스는 과학 발전을 위한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이론 정립 및 발견으로부터 실험과 연구, 그리고 실용화와 기술 이전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관통하는 협력과 공생의 패러다임을 확립하자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유네스코가 9월 30일자로 193개 회원국에 공개한 오픈 사이언스 권고 초안에서 규정하는 오픈 사이언스의 정의는 “과학적 지식과 방법, 데이터, 증거 등에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과학 및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과학계의 협력과 정보 공유를 향상시키며, 과학적 지식의 생산과 유통 과정을 일부 과학 종사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개하자는 일련의 운동과 주장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누구나 과학적 지식과 실험 및 분석 데이터에 자유롭게 접근하도록 만들고(Open Access), 누구나 이들 자료를 효과적으로 모아 분석 및 활용토록 하고(Open Data), 그 결과물이 모든 시민들에게 공개되도록(Open to Society) 함으로써 과학이 사회 구성원 모두를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유네스코는 코로나19와 같은 새로운 질병의 등장과 기후위기, 생물다양성 감소 등 인류가 마주한 전 지구적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류 사회 구성원 전체의 협업이 필수적이라는 분석하에 오픈 사이언스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간 일부 과학자들이나 자금 및 권한을 가진 연구소만 접근 가능했던 최신의 연구 자료를 더 많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활용하도록 도움으로써 과학이 더 효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인류가 현재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에서다.
이제 벽을 무너뜨릴 때
사실 오픈 사이언스의 한 축이라 할 수 있는 ‘오픈 액세스’, 즉 논문이나 연구 데이터에 접근하기 위한 장벽을 없애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활용토록 하자는 주장은 이미 과학계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어 왔다.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연구 결과물을 살펴보고 검증하도록 하는 개방성이야말로 근대 이후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지탱해 온 핵심 요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국 왕립학회는 지난 2012년에 발간한 과학 정책 보고서 『열린 산업으로서의 과학』(Science as an Open Enterprise)에서 “과학 이론 및 이를 바탕으로 한 실험과 관찰 데이터를 담은 (공개된) 출판물은 다른 사람들이 오류를 검증해 지지 혹은 반론을 펼치거나 이를 보완한 뒤 또다른 지식이나 새로운 사실을 탐구하기 위한 바탕으로 활용된다”고 설명하고, 따라서 “개방성이야말로 과학이 강력한 자기 검증과 오류 수정 능력을 갖게 된원천”이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21세기 이전까지 과학의 이러한 개방성은 주로 ‘과학계 내부의 개방’을 의미했던 것도 사실이다. 주요 과학 이론과 연구 결과물은 몇몇 세계적 과학 저널에 게재된 뒤 이를 유료로 구독하는 전 세계 과학자들과 공유되고, 그 안에서 상호 토론과 검증 과정을 거쳐 왔다. 하지만 21세기 이후 세계 구석구석을 연결하는 인터넷망과 광범위한 데이터를 저장하고 처리할 수 있는 컴퓨터의 발달이 맞물리면서, 이전까지 과학 지식의 허브 역할을 했던 과학 저널의 폐쇄적 속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졌다.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지식을 널리 공유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음에도 과학계가 여전히 유료 구독 기반 저널이라는 폐쇄적인 창구를 통해서만 새로운 지식을 발표하고 공유하는 관행은 오히려 과학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불만이 터져나온 것이다.
오픈 액세스 운동을 지지해 온 사람들은 ‘정부 예산, 즉 국민의 세금이 투입된 연구 결과물들이 이들 저널의 유료 구독이라는 벽 안에 갇힌 채 이를 이용하고자 하는 개인과 단체가 천문학적인 구독료를 지불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세계적인 과학자들도 점점 많아졌다.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 메달 수상자인 티머시 가워스(Timothy Gowers)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가워스 교수는 2012년에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셀』, 『랜싯』 등 권위 있는 과학 저널을 보유한 세계 최대의 과학·의학분야 학술출판기업인 엘스비어(Elsevier)의 모든 저널에 앞으로 자신의 연구 결과물을 등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뿐만 아니라 가워스 교수는 학술 저널 대신 자신의 블로그에 오랫동안 미제로 남아 있던 수학 문제를 올리며 공개 연구 및 토론을 제안했고, 불과 한 달여 만에 27명의 참가자들이 올린 800여 개의 댓글에 힘입어 이 문제를 풀어내며 디지털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활용한 개방과 공유의 효용을 직접 입증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선에서 연구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이를 검증받기를 원하는 과학자들은 원론적으로 오픈 사이언스가 촉구하는 개방과 공유, 협력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오픈 액세스 운동의 직접적 대상이 된 세계적 과학 저널 중 하나인 『네이처』의 필립 캠벨 편집장도 지난 2012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연구 결과물을 더 많은 사람이 사용 가능하고 이해하기 쉽게 다듬어 출판하는 과정에 대한 비용과 노력을 구독료 형태로 징수하는 과학 저널들의 입장을 변호하면서도 “(과학적 지식의 개방과 공유가) 언젠가는 이루어지게 될 흐름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협력이 가져다 줄 보상 이상의 가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픈 사이언스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살아 온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막대한 자금과 노력이 들어간 연구 결과 및 데이터를 ‘무료’로 공개해야 마땅하다는 오픈 사이언스의 주장이 오히려 급진적이며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전문가들도 오픈 액세스 운동이 어렵지 않게 과학계 전반의 지지를 이끌어낸 것과 달리, 개방과 공유를 가로막는 특허권과 지적재산권 문제는 오픈 사이언스에 대한 민간 기업과 연구소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특허 및 지적재산권과 여기서 나오는 경제적 이익이 민간 과학계 및 여기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이 연구를 지속하게 만든 주요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의 오픈 사이언스 권고에 대해 강력한 지지 입장을 밝혀 온 국제과학위원회(ISC)도 지난 6월 발간한 「전 지구적 전환을 위한 오픈 사이언스」(Open Science for the Global Transformation) 보고서를 통해 “일부 과학 커뮤니티가 이미 익숙한 인정 및 보상 체계에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데 대해 미온적일 수 있다”는 점을 오픈 사이언스에 대한 공감대 형성의 장애물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하지만 ISC가 해당 보고서에서 “이보다 중요한 것은 전 세계 과학계와 관련 종사자들이 오픈 사이언스의 철학과 실행을 위한 과학계의 변화에 확고한 공동의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한 것처럼, 많은 과학자들은 오히려 오픈 사이언스야말로 기존의 지적재산권과 특허권 이상의 가치를 과학계에 가져다줄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하고 있다. 옥스퍼드대 유전자구조컨소시엄의 차스 본트라(Chas Bountra) 박사는 지난 2013년 옥스퍼드대에서 열린 ‘21세기 과학의 경직성과 개방성’ 컨퍼런스에서 과학계와 민간 기업 및 투자자들이 과학 발전을 위한 당연한 보상으로 여겨 온 지적재산권과 특허가 오히려 과학 발전을 저해하는 측면도 크다는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과학계 전체로 보면 민간 기업과 연구소들이 공유와 협업 대신 비슷한 연구를 각기 따로 진행하면서 발생하는 낭비와 지연이 경쟁으로 인한 과학 발전의 순기능보다 더 크다는 뜻이다. 본트라 박사는 그 예로 1999년 세계적 제약기업인 글락소 웰컴사가 획기적인 동물 진통제 개발의 가능성이 있는 한 연구 결과를 갖고 상품화에 뛰어들었다가 3년만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했지만, 2010년까지 이를 비밀에 부침으로써 전 세계 60여 개 이상의 제약사들이 10여 년간 실패가 예정된 그 연구에 매달리도록 방치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이어 “이 모든 경쟁과 비밀주의, 지적재산권에 대한 집착과 연구 결과 공개의 지연으로 인해 우리는 엄청난 돈과 사람들의 경력, 무엇보다 환자들의 생명을 허공에 날리고 있다”고 비판하며 경쟁과 독점이 아닌 협업과 개방이야말로 21세기 과학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고 역설했다.
바로 지금이어야 하는 이유
20세기에 이어 21세기에도 과학이 인류의 다른 그 어떤 분야보다도 더 눈부신 발전을 이어갈 것이라는 예상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이 지구와 우주, 그리고 생태계와 인간 사회에는 과학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주제가 여전히 많으며, 과학은 인공지능과 유전자 가위 등과 같이 이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분야를 스스로 만들고 개척해 나가고 있기까지 하다. 이처럼 일견 ‘잘 나가고 있는’ 과학계에 대해 유네스코가 오픈 사이언스라는 화두를 던지고, 기존 관행으로부터의 과감한 전환을 촉구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지금이야말로 오픈 사이언스로의 전환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인프라가 마련된 때이며, 지금이야말로 인류의 현안을 해결하고 지속가능발전을 달성하기 위해 한층 더 효과적이며 혁신적인 과학의 힘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실시간으로 잇는 정보통신기술과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컴퓨터, 그리고 모든 분야의 다양한 식견을 가진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소셜 네트워크에 이르기까지, 지식의 공유와 분석과 상호 검증이라는 과학의 전통적 진행 단계의 속도와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술은 이미 대부분 마련이 된 상태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뜻을 하나로 모을 수만 있다면, 과학계는 좀 더 넓은 안목과 장기적이며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통해 개인, 단체, 혹은 한 국가 단위로는 감히 도전할 수 없었던 문제들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결코 장밋빛 꿈에 취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절박함에서 우러나온 호소이자 경고이기도 하다. 코로나19의 대응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절감했듯, 지금 인류 앞에는 한두 명의 천재 과학자가 아니라 60억 명의 하나된 힘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과제들이 많이 놓여 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막대한 과학적 자산을 독점하고 있는 선진국들이, 독점적 지위와 경제적 이익을 갈망하는 기업들이, 그리고 지적 호기심과 인류애로 무장한 과학자들이 결단을 내릴 수만 있다면, 인류는 그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지 않아서 시도하지 못했던 여러 난제들에 대한 의미 있는 도전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 theGuardian.com “Academic Spring: How an Angry Maths Blog Sparked a Scientific Revolution”(2012), “Open Access to Research is Inevitable, Says Nature Editor-in-Chief”(2012)
· oecd.org “Why Open Science is Critical to Combatting COVID-19”(2020)
· unesco.org “UNESCO, WHO and the UN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 Call for Open Science”(2020)
· youtube.com “Chas Bountra at OpenOxford”
· UNESCO 「First Draft of the UNESCO Recommendation on Open Science」(2020)
· The Royal Society Science Policy Centre 『Science as an Open Enterprise』(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