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만인에게 평등하게’ 흐르지만, 그 물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대우받아 온 것은 아니다. 이에 국제사회는 인류 공동의 자산인 수자원을 각국이 평등하게 활용하고 보호하는 문제를 고민하는 한편, 특히 수자원의 활용 과정에서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도 다각도로 마련하고 있다.
인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물과 관련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온 주체는 여성들이었다. 생계를 위해 물을 길어 와서 요리하고, 빨래하고, 아이들을 씻기는 등 물과 관련된 집안일은 대부분 여성들의 몫이었고, 그 과정에서 여성들은 자연스레 수원의 종류, 위치, 수질, 저장법 등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 하지만 이에 비해 효율적인 수자원 활용에 대한 교육이나 의사결정과정에 여성이 참여할 기회는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국제사회는 오래전부터 물에 대한 여성의 권익 증진을 위한 다각적인 논의들을 해 왔다. 1992년 더블린에서 열린 ‘물과 환경에 관한 국제회의’는 물과 여성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촉구했고, 2002년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세계지속가능발전정상회의’에서는 물에 대한 여성의 역할이 지속가능한 발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의를 펼치기도 했다. UN은 ‘생명을 위한 물 10년 계획’(2005-2015)을 선포하고 물에 대한 여성의 참여 활성화를 주요 의제로 다루었으며, 2015년 채택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에서는 SDG 5(양성평등)와 SDG 6(물과 위생)의 연계성을 중요한 과제로 다루고 있다.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많은 개발도상국에서는 물 분야에서 양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들이 있겠지만, 수자원 이용과 관련한 ‘성 분리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점도 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성 분리 데이터란 일반 데이터를 통해서는 파악이 어려운 성 불평등 요소들을 분석하기 위해 남녀를 분리하여 수집한 데이터를 뜻한다. 예컨대 ‘물 관련 교육을 받은 전체 인구’를 수집하는 대신, 관련 교육을 받은 남성과 여성의 숫자를 따로 집계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 분리 데이터는 성 감수성이 높은 정책을 결정하고 수립하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자료로서 중요하게 활용된다.
유네스코 물 안보 국제연구교육센터는 물과 젠더 이슈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국내외 다양한 학술행사를 통해 관련 기관 및 전문가들과 소통을 해 왔다. 그 일환으로 지난해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물평가프로그램(World Water Assessment Programme, WWAP)과 함께 유네스코 방콕사무소에서 ‘물과 젠더 워크숍’을 공동 주관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물 분야 공무원과 전문가 12명이 참가해 이틀간 진행된 이번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은 성 분리 데이터의 중요성을 논하고 데이터 수집법을 공유했다. 워크숍에는 WWAP가 연구를 통해 개발한 툴킷(Toolkit)이 사용됐다. 툴킷은 물 관련 성 분리 데이터 수집과 분석을 돕는 사회조사방법 도구이자 실무지침서로, 10가지 주제에 따른 지표, 데이터 수집 방법론, 가이드라인, 질문지 등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가국의 물과 젠더 관련 이슈에 대한 발표를 통해서도 성 분리 데이터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남녀 구분이 없는 화장실로 인해 월경을 시작하는 여학생들이 학업을 중도 포기하는 동티모르,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수영을 배울 수 없기 때문에 쓰나미와 홍수로 인한 여성 사망자의 비율이 높은 인도네시아 등의 사례를 통해 대중매체나 보고서에서 접했던 개도국의 현실을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사례들이 단순히 ‘학업중단율’, ‘사망률’ 등의 통합적인 통계로만 표현된다면 성별 간의 격차 파악은 불가능하며 정확한 현황을 분석할 수 없게 되고, 그에 대한 해결방안 마련도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참가자들은 이번 워크숍이 기술적 해결을 통해 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존의 믿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젠더 이슈가 반영된 데이터 축적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평가했으며, 앞으로 툴킷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센터 차원에서도 이번 워크숍은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물’이라는 포용적인 물 안보 확산을 위한 우리의 역할과 교육 방향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끝으로 지면을 빌려 물을 보다 현명하고 지속가능하게 사용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포용적인 물 안보를 위한 물 안보 국제연구교육센터의 활동에 관심을 가져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김새봄 유네스코 물안보 국제연구교육센터 교육출판팀 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