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유네스코의 청년 활동 70년
지난 70년간 청년 분야에서 “청년에 의한, 청년과 함께하는, 청년을 위한”(by youth, with youth, for youth) 활동을 펼쳐 온 유네스코는 이 사회의 청년들이 잠재력과 창의성을 맘껏 펼치게 될 때 인류의 미래를 진정으로 바꿀 힘이 생길 것이라 믿고 있다. 평화를 정착시키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어 갈 열쇠를 쥐고 있는 청년을 위해 유네스코와 한국이 걸어 온 70년을 돌아본다.
주체적 청년 활동의 씨앗
유엔은 공식적으로 15~24세까지의 계층을 ‘청년’(youth)으로 정의하지만, 이 계층을 단순히 한 단어로 아우르는 일은 간단치가 않다. 육체적으로는 컸으나 정신적으로는 아직 더 자라야 한다고 여겨지는 십대 청소년에서부터 사회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르는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여기 속한 개인들은 다른 그 어느 계층의 구성원들보다 다채로운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유네스코도 “청년의 정의는 유동적이고 지역이나 국가에 따라 청년들이 겪는 경험의 폭은 편차가 크다”며, 그렇기 때문에 “청년을 이야기할 때 맥락(context)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청년은 일방적으로 보호받고 교육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며, 각각의 특징들이 보여주는 맥락에 따라 그 활동과 지원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관점이 유네스코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시기는 1960년대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유네스코는 청년 활동의 패러다임이 ‘보호와 육성에 초점을 맞춘 사회 순응적(pro-social) 활동’에서 ‘기성 세대의 동반자이자 사회의 독립된 구성원으로서의 통합적(integrative) 활동’으로 바뀌었다고 진단하고 1964년 제13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그르노블 국제청년전문가회의’의 권고 내용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각국에 청년 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다양한 경제적·정책적 지원을 요청한 해당 권고는 이후 각 회원국들이 자국의 청년 정책을 전반적으로 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했고, 1965년 12월 유엔이 ‘청년의 평화이념 및 국민 간 상호존중과 이해의 증진에 관한 선언’을 채택하는 바탕이 되었다.
1960년대에 변곡점을 맞은 유네스코의 청년 활동은 국내 청년 사업의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1954-1956년까지 대학생을 주축으로 농촌 지역 문해교육, 생활 개선, 의료 봉사 활동 등을 펼친 ‘유네스코학생건설대’ 사업에서도 볼 수 있듯 초창기 국내 유네스코 사업의 우선 순위는 ‘문해교육과 청년 교육 및 청년 운동을 통한 국가 재건 기여’에 있었다. 하지만 국제청년전문가회의의 권고 사항을 국내에 적용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하면서부터 우리나라의 청년 사업도 청년 중심의, 청년을 위한 활동을 심도 있게 고민하게 되었다. 청년 문제 전반에 대한 학문적 논의와 청년 관련 문제들을 이슈화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정책 논의의 장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열렸다. 1965년 5월에 해당 권고의 국내 이행 및 청년 사업의 방향과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열린 ‘청소년문제연구협의회’는 그 출발점이었다. 이 회의는 같은 해 12월에 15개 단체로 설립된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의 모태가 됐으며, 오늘날 71개 청소년 단체가 참가하는 국내 유일의 청소년단체네트워크로 발전했다. 1965년 6월에는 ‘유네스코 학생활동 지도교수 협의회’도 결성됐다. 이 협의회는 한국 실정에 맞는 학생활동과 국제 활동을 개발·지원하는 방안을 제안했고, 이에 따라 1965년 7월에는 서울대 농과대학에서 전국 대학 학생회 임원과 대학신문 기자 등이 참석한 유네스코 하계학교가 열렸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대학생들은 당시의 대학 상황과 학생운동의 문제와 한계를 성찰하면서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대안적 학생운동을 고민했고, 이후 서강대 등 13개 대학교에서 ‘유네스코학생회’(Korean UNESCO Student Association, KUSA)가 창립되면서 새로운 학생 활동에 나서게 된다. 청년들의 자각적 탐구와 실천적 참여를 근간으로 하는 ‘새물결운동’도 이때 시작됐다. 1967년 11월 4일에는 성균관대학교에서 ‘제1차 새물결운동 전국대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한국유네스코학생협회가 출범했다. KUSA는 이후 새로운 청년문화를 만들고 청년 활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등 국내 청년 분야 유네스코 활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배움과 연구로 틔운 변화의 싹
KUSA의 활동과 더불어 대학가에 불어닥친 ‘새물결운동’은 청년들이 스스로 공부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사회와 미래를 만들어 가기 위한 실천과 행동에 나서도록 독려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KUSA는 새물결운동을 통해 학내 선거 정화운동, 고전읽기, 학생연구발표모임, 한글 바로적기, 나무심기운동 등 다양한 자발적 운동을 펼쳤고, 대학생들로 구성된 새물결편집실 주도로 1966년부터 청년문화에 대한 담론들을 게재한 『새물결』 잡지를 발간했다. 1967년 이후에는 매년 ‘공동활동목표’를 설정해 전국 유네스코학생회 지회들이 자신과 지역사회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생활실천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KUSA의 여러 활동 중 국내 청년 활동에 빼놓을 수 없는 족적을 남긴 것으로 ‘조국순례대행진’을 들 수 있다. 1974년부터 1993년까지 개최된 조국순례대행진은 참여자인 청년 및 학생에게 방학 기간 학생 활동의 대안을 제시한 것은 물론, 새로운 청년활동 및 청년문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여름방학 기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젊은이들의 행렬은 해를 거듭할수록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과 격려를 받았으며, 대학 사회뿐만 아니라 국내 청년 단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줌으로써 이후 많은 국내 단체들이 주관한 유사한 형태의 국토순례 프로그램의 원형이 됐다.
국내 청년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청소년의 교외 교육과 야외 활동을 위한 시설 확충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1977년 경기도 이천에 설립된 ‘유네스코청년원’(현 유네스코평화센터)은 청년들에게 배움의 터전을 제공하는 한편, 다양한 연수 과정을 꾸준히 연구·개발함으로써 국내 청년 활동을 질적으로 한 차원 높인 것으로 평가받았다. 지도교수제를 도입해 국내 여타 연수와 차별화된 시스템을 갖춘 유네스코청년원은 1970-90년대에 청소년 활동 지도자 연수 과정, 청소년 연수 과정 , 대학생 연수 과정 및 관련 자문회의를 개최하는 등 청년 활동에 관한 다양한 연구와 연수 업무를 수행했다. 특히 청소년 문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청소년 지도를 담당할 전문적인 청소년 활동 지도자가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1979년부터 1997년까지 진행한 ‘청소년 활동 지도자 연수 과정’은 한국의 청소년 지도자 훈련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통합적 패러다임에 기초해 ‘청소년의 이해’, ‘청소년과 집단활동’, ‘청소년과 지역사회’, ‘청소년과 정책’ 등 네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4박 5일간 진행된 이 프로그램은 이후 정부 차원에서 개발된 ‘청소년 지도사 자격과정’ 프로그램의 모델 역할을 했고, 대학에 개설된 청소년 관련 학과의 커리큘럼 개발에도 영향을 주었다.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 외에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근로청소년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일에도 관심을 쏟았다. 1978년에 시작해 총 50차례 열린 ‘근로청소년 연수’는 주입식 교육에 흥미를 잃고 학교에 적응하는 데 실패했거나 어려운 가정 사정 때문에 취업을 선택한 근로청소년들이 다시금 교육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를 쌓는 데 도움을 주었다.
대학생과 청년 활동 지도자에서부터 근로청소년에 이르기까지, 1970년대 이후 한국은 국내 청년 활동의 저변을 탄탄하게 다지는 한편, 전 세계 청년들과의 대화와 교류를 위한 학술적 기반을 다지는 데도 힘썼다. 1966년부터 실시된 ‘국제청년야영’과 1998년부터 실시했던 ‘국제자원활동’ 사업이 참여와 현장성을 중시하는 사업이었다면,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열린 ‘유엔대학 글로벌 세미나’는 평화와 갈등 해결, 지속가능발전 등 범 지구적 주제를 논의하는 동북아 지역의 대표적 청년 학술행사로 자리매김하며 청년들로부터 수준 높은 담론과 치열한 고민을 이끌어냈다. 유네스코 방콕사무소가 이 세미나에서 채택된 결의문의 내용을 정책과 향후 사업에 반영할 정도로 유엔대학 글로벌 세미나에서는 수준 높은 논의가 진행됐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 청년들은 지적 역량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고 각국 참가 학생들과 어울리며 교류와 협력의 폭을 넓혀갈 수 있었다.
손 맞잡은 청년들이 열어갈 미래
유네스코가 청년 사업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 것은 “청년은 사회 변화의 주체이자 성인의 동반자”라는 유네스코의 청년관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같은 믿음을 갖고 국내외 청년들이 다양한 활동을 통해 변화를 이끌어 내기를 기대하고 있다. 특히 지정학적 위치에서부터 경제적 이유에 이르기까지 타 문화권 및 다른 나라와의 원활한 교류가 필수적인 우리나라에 있어 전 세계 청년들과 격의 없이 교류하고 연대하며 전지구적 이슈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청년을 양성하는 것은 미래를 대비한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한국이 국내 청년 활동을 장려하면서, 많은 제한 속에서도 일찍부터 청년들의 국제 교류에 관심을 쏟아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해외여행은커녕 일반인들로서는 외국과의 교류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던 시절, 청소년의 국제 교류를 위해 1966년부터 매년 ‘국제청년야영’을 개최한 것은 그래서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1966년 ‘국제야영봉사’(IWC)라는 이름으로 한국 청년과 외국 청년 49명이 공사 현장에서 흙을 퍼나르며 시작한 이 활동은 1979년부터 직접적인 노력 봉사 대신 국제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데 중점을 둔 ‘국제청년야영’(IYC)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국제청년야영은 유네스코 본부에서도 성공적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국제적인 반향을 이끌어냈고 이후 한국이 국제자원활동 사업으로 그 영역을 넓히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 청년들이 보다 자유롭게 해외로 나갈 수 있게 되면서 단순한 해외여행보다 인류의 발전과 평화를 위한 활동들을 경험해 볼 수 있는 해외 봉사활동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다. 이에 정부는 1989년 ‘한국청년해외봉사단’ 파견을 결정하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를 중심으로 파견을 희망하는 청년들을 모았다. ‘평화, 발전, 참여’를 기본 이념으로 삼아 인류의 보편적 복지를 증진하고 국가 발전의 기반을 조성한다는 목표 하에 조직된 한국청년해외봉사단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네팔, 스리랑카 등지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며 현지 주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당시 선진국에서 추진하던 봉사활동이 자국의 해외시장 개척과 자국 인력의 해외 진출에 역점을 둠으로써 제3세계 등 개발도상국과 갈등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었던 반면, 한국청년해외봉사단 사업은 파견 대상국과의 긴밀한 협력 아래 순수한 봉사활동으로 추진되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6·25전쟁의 피해를 입고 오랜 기간 동안 선진국의 원조를 받던 우리나라가 이 사업을 통해 다른 나라를 돕는 입장으로 바뀐 점 또한 한국청년해외봉사단이 갖는 중요한 의미로 평가된다. 이후 이 사업은 1991년 정부의 시책에 따라 개도국 협력사업의 창구 일원화를 위해 한국국제협력단(KOICA)으로 이관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계속 실시되고 있다. 한편, 유네스코한국위원회도 1998년부터 국제자원활동 사업을 청년 활동의 장기 중점과제로 삼고 국내 최초로 한국 청년들을 해외 단기 워크캠프와 중장기 프로젝트 등 다양한 국제 자원활동 현장에 파견함으로써 공동노동과 현지 문화교류를 통해 다른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현실 문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2010년대에 들어서는 우리 청년들이 유네스코 브릿지 아프리카 사업 현장으로 파견돼 교육 소외 지역의 문해교육과 지역사회 발전을 돕는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전 세계의 청년들과 교류하고, 때론 치열하게 논쟁하거나 때론 아낌없는 도움을 주기도 하면서 한국의 청년들은 그동안 부쩍 커진 한국의 국력에 걸맞는 실력을 쌓아 나가고 있다. 다만 세계 곳곳에서 평화의 씨앗을 뿌리고 변화를 이끌어 낼 활동들을 펼치는 와중에도 한국 청년들에게 ‘숙제’와도 같은 일이 한 가지 남아있다면, 그것은 바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역사를 둘러싼 반목을 청산하고 화합의 길을 닦는 일일 것이다. 2000년대 말부터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역사 인식을 둘러싸고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역사화해 국제포럼’ 및 ‘유네스코 청년역사대화 국제포럼’은 바로 그 숙제를 청년들의 관점에서 풀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도였다. 먼저 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에 걸쳐 열린 동아시아 역사화해 국제포럼은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의 시각으로 갈등의 원인과 해결 방안을 찾고, 역사 대화를 다층화하고 시민사회 간 교류를 증진함으로써 공동의 미래 비전을 발전시키고자 한 행사였다. 포럼이 진행되면서 진정한 역사 화해를 위해서는 전문가나 정부뿐 아니라 젊은 세대의 관심과 참여가 꼭 필요하다는 인식도 확산됐고, 이는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열린 동아시아 청년역사대화 국제포럼의 동력이 되었다. 한국, 중국, 일본을 포함한 16개국의 18-30세 청년들이 참가한 이 포럼에서 청년들은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 인식과 교육 현황 등을 되짚어보고 서로 공감대를 넓히며 개선책을 찾아보는 한편, 민족주의 중심의 ‘갈등의 역사’에서 동아시아라는 기반 위에 세워지는 ‘공동의 역사’로 역사 인식을 전환할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작지만 의미 있는 청년들의 시도는 한국의 유네스코 가입 70주년을 맞은 올해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여전히 청년들의 오늘은 고달프고 그 미래는 불확실해 보이기도 하지만, 유네스코는 70년에 걸쳐 유네스코와 청년들이 뿌리고 가꿔 온 평화와 공존의 씨앗이 지금 이 순간에도 모두의 마음 속에서 조금씩 자라고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우리 모두가 미래 세대에 더욱 적극적으로 다가서고 그들의 역량 개발을 지원하며 청년들이 변화의 바람을 불러 일으킬 토대를 마련해 준다면, 유네스코와 한국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청년의 시대’는 머잖아 우리의 앞날을 환히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에서 지구촌 나눔의 주역으로』(2014)
『교과서 한 권의 기적: 유네스코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꿨나』(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