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나 중동으로, 발칸 반도를 지나 유럽으로, 그리고 중동과 시베리아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퍼져나갔던 인류는 21세기에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분쟁과 재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혹은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찾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이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그 옛날 폐쇄적인 부족사회 시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네스코는 단편적이며 정치적인 해법만으로는 그러한 시선과 보이지 않는 벽을 없앨 수 없으며, 대신 포용과 관용, 즉 타인을 향한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우리 모두의 지속가능한 번영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뼛속에 남겨진 이주의 역사
인류의 역사는 곧 이주의 역사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중부 아프리카에 처음 나타난 호모 사피엔스가 익숙한 땅 밖으로 용감하게 발을 내딛지 않았더라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류 문명의 불꽃이 피어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혹은 한참 더 늦어졌을지 모른다. 낯선 땅, 낯선 풍토를 견디며 발걸음을 내딛은 인류는 그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고 싸우고 서로 섞이면서 새로운 길을 열었고, 오늘날 세계 도처에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들은 그러한 이주와 교류와 상호 작용의 시간을 증언하고 있다.
최신 유전자 분석기술을 활용한 고고학, 즉 고고유전학(Paleogenomics)은 이들 유적과 유물이 그저 ‘기술교류’의 흔적이 아니라 긴밀한 인적교류, 즉 이주민과 정주민 간 접촉의 산물이었다는 보다 명백한 증거를 찾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올해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스반테 페보(Svante Pääbo)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진화인류학분과장이 개척한 고고유전학은 지금까지 특정 문화권에 속한 유적에서 발견된 타 문화권의 유물, 혹은 특정 인간 조상의 유골과 함께 출토된 다른 인간 조상의 유골 등을 통해 유추하던 교류의 양태를 유전자 분석을 통해 더욱 정확하게 파악하게 해 준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의 고고유전학 공동팀장인 에바-마리아 기글(Eva-Maria Geigl) 박사는 지난해 유네스코 『꾸리에』와의 인터뷰에서 ‘5만 년 전 아시아 지역의 네안데르탈인과 아프리카에서 막 건너온 사피엔스 간의 교류, 8500년 전 중동의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짓다 동지중해로 넘어온 사람들과 현지인 간의 교류, 5천 년 전 흑해 북부 초원지대에서 옮겨온 얌나야(Yamnaya)인과 북부 유럽인 간의 교류’ 등을 고고유전학이 증명해낸 이주와 교류의 흔적으로 꼽으며, “우리는 태초부터 끊임없이 이동하며 서로 섞인 사람들이고, 결국엔 우리 모두가 이주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이주의 역사가 언제나 평화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주는 때때로 토착민의 절멸을 가져오기도 했다”는 기글 박사의 말처럼 인류의 이동은 종종 정복과 침략을 동반했고, 그 과정에서 학살 역시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인류의 이주 역사를 강조하는 것이 그러한 침략과 학살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동족’과 ‘핏줄’에 대한 우리의 뿌리 깊은 애착이 반드시 불가침의 영역일 필요는 없으며,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막아서서도 안 된다는 것이 이주민으로서의 인류, 즉 호모 코메르시움(homo commercium, 교류하는 인간)과 호모 모벤스(homo movence, 이동하는 인간)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진짜 의도다. 인류는 태초부터 이동해 왔고, 발달된 기술과 교통망에 힘입어 앞으로도 더욱 그러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을 가슴에 새긴다면 국경의 문을 두드리는 타인에 대한 우리의 날 선 마음도 조금이나마 누그러질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의 입이 아닌, 데이터로 보는 현실
모두가 결국 이주민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더라도 눈앞의 이방인에게 자신의 터전 한 편을 흔쾌히 내줄 마음을 갖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실제로 지난해 우리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극적으로 탈출시킨 현지인들은 전 국민의 환영을 받으며 한국 땅에 들어왔지만, 수개월 뒤 그들의 자녀가 등교하기로 한 초등학교 앞에는 난민 자녀의 등교를 반대하는 일부 지역 주민들의 현수막이 내걸리기도 했다. 큰 재난이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울분과 원망은 손쉽게 이민자와 외지인을 향하기도 하며, 여론에 민감한 언론은 자의든 타의든 그러한 분위기를 부채질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대중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 일례로 우리는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중국인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던 가해자였지만, 미국과 유럽에서 무차별적으로 아시아인 대상 혐오범죄가 발생했을 때는 억울하게 고통받는 피해자였던 경험이 있다.
겉모습과 사는 방식이 나와 다른 이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그리고 그 차이를 극복하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이성적인 시민의식은 늘 우리 마음속에 공존하고 있다. 문제는 이방인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은 자그마한 불씨만으로도 손쉽게 편견과 차별이라는 큰 불로 발화할 수 있으며, 강력한 전파력을 가진 오늘날의 미디어를 활용해 이러한 속성을 악용하려는 시도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의도를 갖고 선별한 데이터만으로 난민이나 이주민의 유입을 ‘위협’으로 간주하는 뉴스, ‘이 땅의 주인’이 힘을 합쳐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맞서야 함을 강조하는 정치인들을 우리는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 할 것 없이 어렵지 않게 목격하고 있다.
따라서 난민과 이주 문제 관련 전문가들은 타인을 향한 대중의 이질감을 어떤 식으로든 활용하려는 자들의 ‘입’이 아니라, 정확한 데이터를 통해 현실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2017년 3월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실린 “난민과 이주민의 이동 관련 데이터의 오류”에서 언급된 사례는 그 좋은 예다. 2015년 중동과 북아프리카발 난민 문제로 유럽 전역이 시끄러웠던 시기, 유럽연합 국경관리청(Frontex)은 “2015년 1월부터 9월까지 71만 명의 비정규 이주자(난민을 포함한 정규 이민 외의 입국자)가 EU로 유입됐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냈고, 이를 주요 언론이 크게 다루면서 유럽 전역에서는 난민 공포가 더욱 확산됐다. 해당 자료의 71만 명이라는 숫자는 그 전 해의 28만2000명과 비교되면서 난민 유입을 긴박하고 커다란 위협으로 보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난도 시고나(Nando Sigona) 영국 버밍엄대 초다양성연구소 부소장은 해당 통계가 유럽 입국 후 제3국을 거쳐 여타 유럽지역으로 다시 들어오는 사람들의 수를 두세 번 이상 중복해 세어 결과적으로 전체 숫자를 크게 부풀렸음을 밝혀냈다. 국경관리청은 곧바로 정정 자료를 냈지만 이미 유럽인들의 머릿속에는 ‘난민 쓰나미 공포’가 깊이 각인된 뒤였다. 시고나 부소장은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당국이 사전에 중복 집계 가능성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수치를 발표했다는 것”이라며 “이는 난민을 다루는 통계에 얼마나 많은 이해당사자가 관여할 수 있는지를 우리가 잘 살펴야 하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네이처』는 “‘숫자’는 난민 문제 인식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문제를 악화시키는 데는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서, “정확하고 시의적절한 데이터 수집과 이를 비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은 사실에 기반한 정책을 세우는 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국경을 여는 일과 마음을 여는 일
그렇다면 지구촌의 난민과 이주민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보기 위해서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 우선 국제이주기구(IMO)가 발표한 2020년 기준 전 세계 이주민의 수인 ‘2억7200만 명’이라는 숫자로부터 우리가 지레 두려움이나 위협부터 느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유네스코 『꾸리에』의 아녜스 바르동(Agnès Bardon) 편집장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이 숫자는 ‘이주민은 실제적 위협’임을 강조하기 위한 정치적 무기로 종종 활용되고 있다”며, 그렇지만 이 숫자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현실, 즉 주요 이주민의 이동은 흔히 생각하듯 저개발국에서 선진국으로가 아닌 중-저소득 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나며, 절반 가까이는 국경을 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가린 채 이주민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키운다”고 지적했다. 더불어 “건조한 숫자 뒤에는 수많은 인간의 운명과 때론 행복하고 때론 비극적인 다양한 이야기, 그리고 우리 삶과 역사가 녹아있는 풍부한 문화적 배경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그저 비극적인 사건만 부각하거나, 전체적인 하나의 숫자만으로는 복잡하고 다차원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이주민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사실 우리가 정말로 위기감을 느껴야 할 부분은 감정을 자극하는 뭉뚱그려진 수치가 아니라, 파열음을 내지 않고 난민과 이주민들과 기존 시민들이 함께 살아갈 시스템이나 시민의식을 아직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난민과 이주민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가 더는 ‘국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부터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난민은 저개발 독재국가나 전쟁이나 분쟁 중인 국가, 또는 지진이나 허리케인 같은 1회성 재난이 닥친 곳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인류는 온난화를 비롯한 기후변화에 아직 성공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앞으로 ‘기후난민’의 발생 빈도와 규모는 더욱 커질 것으로 예측된다. 과거의 난민이 경제적인 이유, 그리고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인 이유로 작게는 지역과 국가 단위, 크게는 대륙 단위를 넘어서지 않는 규모에서 발생했던 데 비해 앞으로의 난민은 동시다발적이며 전 지구적인 현상이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21세기의 이주민 문제를 ‘우리에게 위협인가 아닌가’로 단순하게 바라보고, 국경 통제 방안 같은 지엽적인 대응책만을 강구하는 것은 금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2021년 4월 유엔난민기구(UNHCR)는 이미 자연재해로 인해 집을 떠나는 사람이 연평균 2150만 명씩 발생하고 있으며, 이는 분쟁이나 폭력으로 인해 발생하는 난민 수의 두 배에 이른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태평양 연안의 기다란 해안선과 안데스산맥의 빙하, 그리고 아마존 지류의 열대우림까지 지구촌의 기후변화 충격을 직접적으로 받는 생태계를 고루 보유한 남미의 페루는 기후변화로 인한 이주와 난민 문제를 가장 많이 우려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다. 이곳에서는 태평양에서 발생하는 엘니뇨(해수 온도의 비정상적 상승)로 인한 홍수나 가뭄으로 상습적인 피난민이 발생하고 있는데, 2017년에는 거의 30만 명이 이 때문에 집을 떠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가 예측한 시나리오 중 최악의 경우(2100년까지 지구 기온 4도 상승)가 현실화된다면 페루는 아마존 삼림 지역의 극단적 고온 현상과 안데스 빙하의 거의 완전한 해빙, 그리고 더욱 극심한 엘니뇨라는 3중고로 커다란 위협에 처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우리가 기후변화라는 전 지구적 재앙을 멈춰 세우지 못한다면 그러한 위기가 페루 안의 일로만 그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기후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난민에 대한 인식제고 활동을 펼치는 단체인 ‘기후난민’(Climate Refugees)의 아말리 타워(Amali Tower) 대표는 7월 28일 미 공영방송국(PBS)을 통해 국제사회가 이제는 기후로 인한 난민과 이주민 문제를 “국경 보안 문제가 아니라 기본권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1세기 이후의 난민과 이주민 문제를 다룰 정책의 초점은 ‘국경에서 어떻게 그들을 막아세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관리하고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을 것인가’로 옮겨가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국경을 두드리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 더는 문을 걸어 잠그거나 출신 지역과 입국 의도에 따라 사람을 구분짓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을 때, 유네스코는 그러한 ‘열린 마음’을 갖기 위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고 필요한 인문학적·사회과학적 연구를 수행하는 데 힘을 보탤 준비가 되어 있다. 유네스코가 2004년부터 시작한 포용적이며 지속가능한 도시 국제 연대(International Coalition of Inclusive and Sustainable Cities, ICCAR)의 활동 역시 큰 틀에서 그러한 차별을 없애고 차별로 인한 고통을 경감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이다. ICCAR은 전 세계 500여 개 도시가 가입한 국제 연대 사업으로, 어떤 형태의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포용적인 도시 개발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 및 역량개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포용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한 ICCAR의 노력, 그리고 인류의 지적 연대를 통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유네스코의 사명은 결국 특정한 방법과 목적으로 인간을 구분짓는 일을 그만둘 것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난민 및 이주민 문제의 해결과 맞닿아 있다. 국경을 넘어온 사람, 나와 뿌리가 다른 사람, 나와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을 구분짓고 차별하는 일을 없애는 것은 일차적으로 정책과 법률의 영역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마음에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꼭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이미 몸소 느끼고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지난 11월 9일 ‘이주민과 다시 그려보는 우리’를 주제로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개최한 ‘유네스코 토크’에서 사전 설문에 응한 일반인들은 ‘인간 상호간의 예의와 배려’, ‘배제와 혐오 없는 문화’ 등을 정책적 측면만큼이나 많이 언급하고 있다.
유네스코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국제연맹 지적협력국제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던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자신의 대표 저서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우리 모두의 ‘열린 마음’(soul that opens)이야말로 타자에 대한 개방과 포용을 허용하는 ‘열린 사회’로 나아아게 해 줄 열쇠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동시에 그는 전 인류를 향한 열린 마음은 내 가족에 대한 본능적인 애착, 내 마을과 내 나라에 대한 본능적인 애착을 점차 확장해 나가면 된다는 생각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내 핏줄과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애착은 본능적이지만, 나와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러한 마음을 갖는 것은 ‘본능을 넘어서는 도약’이 필요한 영역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단 우리부터 챙기고 그 다음은 차차 조금씩”이라는 달콤한 속삭임에 맞서 그러한 ‘본능을 넘어서는 도약’을 이룰 준비가 되어 있을까? 지난 80여 년 가까이 ‘포용과 연대’의 한우물을 파 온 유네스코로서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자면, 이미 불편함을 감수하고 일회용 컵 대신 텀블러를, 비닐봉지 대신 장바구니를 기꺼이 챙기게 된 우리에게 ‘우리를 낯설게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갖는 단계가 생각보단 멀지 않은 곳에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