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는 수백만 명의 머릿속에 한 개의 이미지를 심어 주지만, 라디오는 수백만 명의 머릿속에 수백만 개의 이미지를 심어 준다.” 「월스트리트저널」의 유명 칼럼니스트 페기 누난(Peggy Noonan)의 말이다. 별이 빛나는 조용한 밤, 우리가 한 사람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것은 분명 귀한 경험이다. 하지만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하지 않으면 쉽게 화젯거리가 될 수 없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라디오가 소중하게 여겨져야 할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비록 등장한 지 100년이 넘은 ‘오래된 목소리’이지만, 라디오는 오늘날에도 정보 접근성과 표현의 자유, 그리고 다양성을 지키는 데 한몫을 담당하는 ‘늙지 않는 목소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이미지 기반 SNS인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비주얼을 갖춘 대상을 일컫는 신조어
돌아온 올드보이
약 석 달 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되면서 하늘을 가로지르던 미사일 중 상당수는 우크라이나의 방송통신 관련 시설을 향했다. 수도 키이우의 높은 방송 중계탑이 미사일에 피격돼 화염에 휩싸이는 장면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이미지였다. 이후 우크라이나 여러 지역에서 방송 및 무선통신망에 장애가 생겼고, 러시아는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층이 이미 투항했다”는 허위정보를 SNS를 통해 대대적으로 송출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의 방어 의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시민들이 정확한 정보를 얻을 길이 차단된 곳은 우크라이나뿐만이 아니었다. 전쟁 발발 직후 러시아에서는 영국 방송사 「BBC」와 독일 국제방송국인 「독일의 소리」(Deutsche Welle) 웹사이트 접속에 대규모 장애가 발생했다. 인터넷 검색(구글)과 SNS(페이스북) 역시 서비스 장애를 빚었다. 해외 뉴스 및 정보 유입을 막기 위한 러시아 정부의 차단 조치 때문이었다. 그러자 「BBC」가 들고나온 대응책은 단파 라디오(shortwave radio) 방송이었다. 지난 2008년에 청취자 감소 및 비용 절감을 이유로 2차 세계대전 때부터 운영해 오던 단파 라디오 방송의 유럽 지역 송출을 중단했던 「BBC」는 매일 오후 4시-6시와 밤 10시-12시에 우크라이나 전역과 러시아 서부 일부 지역으로 전파를 다시 송출하기 시작했다. 팀 데이비(Tim Davie) 사장은 “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는 진실”이라며 “허위정보와 프로파간다가 넘쳐나는 분쟁 상황에서 정확하고 독립된 뉴스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에 자사가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응할 것임을 강조했다.
라디오가 곧 생명줄인 국가들
우크라이나 지역에서의 뉴스 전달을 위해 「BBC」가 선택한 방법이 14년 전에 중단됐던 ‘구시대의 유물’이라 할 수 있는 단파 라디오인 이유는 분명하다. 기존 방송 매체 중에서 중계기나 유선망 설치 없이 단파 라디오만큼 넓은 지역을 아우를 수 있는 매체가 없기 때문이다. 사용하는 주파수 영역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되는 라디오 전파 중에서 흔히 AM 라디오 방송이 이용하는 주파수인 중파(300kHz-3MHz)와 단파(3MHz-30MHz) 영역대의 전파는 지구 대기권 상단의 전리층에서 반사되며 발신지로부터 짧게는 수백 킬로미터(중파), 길게는 수천 킬로미터(단파) 이상까지 멀리 퍼져나갈 수 있다. 이같은 특징 덕분에 단파 라디오 방송의 전성기는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20세기 중반이었다. 당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주요 국가들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같은 국영 라디오 매체들을 중심으로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으며 보이지 않는 전파 전쟁을 치렀고, 그 덕에 사람들은 저렴한 라디오 수신기만 있다면 어디에서든 이들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체제 경쟁의 당사자가 아니라도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은 영어 공부를 위해,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그 외의 여러 이유로 저 먼 나라에서부터 들려오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이후 구소련의 몰락을 기점으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각국 입장에서는 자국의 방송을 국경 너머까지 보내야 할 중요한 동기 중 하나가 사라졌다. 그 사이 라디오 방송의 중심도 스테레오 방송이 가능할 정도로 더 좋은 음질과 수신 감도를 갖춘 초단파(VHF) 대역을 활용하는 FM라디오로 옮겨갔고, 새로 등장한 여러 현대 미디어들이 라디오의 청취자를 빼앗았다. 주요 선진국들은 2000년대 들어서도 국·공영 방송국을 중심으로 중·단파 라디오 방송을 비상시에 활용할 수 있는 채널로서 한동안 유지했지만 그 경향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심지어 라디오 방송의 중단 혹은 축소 소식은 라디오가 이미 더는 주요 미디어 소비 채널이 아닌 선진국에서 큰 뉴스가 되지도 못했다. 문제는 이렇게 라디오 방송이 중단되면서 태풍이나 지진, 쓰나미 등 생명 및 재산과 직결되는 정보를 국제 라디오 방송에 의존해 왔던 많은 국가, 특히 소규모 도서 국가에서 정보 공백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호주의 방송국 「ABC」가 80년간 남태평양 도서 국가 지역으로 송출해 오던 단파 라디오 방송을 2017년부터 중단한다고 발표했을 때 폴리네시아와 멜라네시아 일대 국가들이 큰 우려를 표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2004년 동남아 연안 국가들에서 23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인도양 쓰나미 때도, 2015년 바누아투를 초토화시켰던 사이클론 ‘팸’(Pam) 때도, 라디오는 끊김 없이 해당 지역에 급박한 정보를 실어나른 바 있다. 태평양 지역의 언론 자유 및 윤리 모니터링 NGO인 ‘퍼시픽 프리덤 포럼’은 “라디오와 재난 상황에서의 통신 간의 긴밀한 연결고리에 대한 일고의 고려도 하지 않은 정책”이라며 「ABC」의 이같은 결정을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한정된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방송사들의 행동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 방송사 입장에서 FM 라디오가 아닌 중·단파 라디오 채널을 통한 방송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곳에서 소리치기’와 별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스스로를 라디오 애청자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차량 라디오를 쓰는 경우를 제외하면 ‘라디오 전파’를 수신해 방송을 듣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대신 휴대전화 앱이나 웹브라우저를 통해 인터넷 망으로 전송되는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는 경우가 더 많다. ‘비상시 대비용’이라는 명목 말고는 방송사가 녹음부터 편집까지 전 과정이 디지털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아날로그 신호에 실어 내보내야 할 이유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라디오의 가치
그렇다면 오늘날의 라디오는 ‘비상 상황에서의 유용한 대안’으로서만 그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일까? 지속가능한 산업 기반을 가꾸어 나가기보다는 정부의 지원과 소수 애호가들의 애정에만 의존해 생명을 부지해야 하는 것일까? 라디오의 쇠퇴가 한창 가속화하던 지난 2012년, ‘세계 라디오의 날’(World Radio Day)을 제정키로 한 유엔과 유네스코가 답을 내놓아야 했던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21세기 이후에도 라디오가 살아남는 것을 넘어, 계속 널리 활용되고 사랑받기 위해 지키고 가꾸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그 유력한 해답 중 하나로 유네스코가 내세우는 것이 ‘표현의 자유와 다양성 보장’이다. 20세기의 라디오가 ‘멀리 퍼져나가는 목소리’로서 각광을 받았다면, 21세기 이후의 라디오는 ‘다양하고 포용적이며 믿을만한 목소리’로서 여전히 우리의 벗으로 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시민들의 저항이나 비판을 막고자 하는 독재 국가에서, 그리고 광고 수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소수 집단에 이야기를 할 기회를 주기 힘든 자본주의 미디어 환경에서 라디오는 표현의 자유와 다양성을 지키는 보루가 될 수 있다. 물론 팟캐스트 같은 오늘날의 오디오 콘텐츠는 라디오의 역할을 더 효율적이고 간편하게 대체할 수 있고, 유튜브는 라디오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광범위하게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디어 전쟁의 양상, 그리고 북한이나 중국처럼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국가들이 시행하고 있는 검열 정책을 감안하면 이들 미디어가 언제 어디서나 시민의 자유로운 목소리로 기능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지난 4월 1일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NPR」은 전쟁으로 인해 주류 미디어가 타격을 입은 우크라이나에서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하며 전쟁으로 지친 시민들의 정신적 휴식을 돕고 있는 소규모 FM 방송국을 소개한 바 있다. 「르비우의 전파」(Wave of Lviv)라는 이름으로 8년간 방송을 해 온 이 라디오는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도 전과 다름없이 인기 대중가요를 소개하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총 대신 ‘웃음’과 ‘여유’를 앞세워 조국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방송 진행자 타라스 하브리크(Taras Havryk) 씨는 “(힘든 일상으로부터) 청취자들의 주의를 뺏는 것이야말로 음악의 역할”이고, “(우리 방송이 청취자들을) 100퍼센트 편안하게 만들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들이 안정을 찾기를 원한다”고 말하며 ‘Die, die, die Putin’ 이라는 가사가 들어간 노래를 신곡으로 소개했다.
하브리크 씨는 이처럼 ‘죽어라 푸틴’이란 가사가 들어간 노래를 틀더라도 러시아로부터 보복을 당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라디오 방송 전파는 오늘날의 기술로도 추적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라디오 로샤니」(Radio Roshani)가 지난 2008년부터 전 세계 최악의 여성 인권 탄압 현장이었던 아프가니스탄에서 페미니즘 방송을 송출할 수 있었던 것도 라디오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쌍방향성을 특징으로 하는 오늘날의 인터넷 기반 서비스는 송신자와 수신자 모두 추적을 피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모든 신호가 네트워크 공급자를 거쳐야 하므로 공급자를 컨트롤하거나(검열) 공급자의 기능을 마비시키면(디도스 등의 해킹 공격) 손쉽게 정보를 통제할 수도 있다. 반면에 신호가 송신자로부터 수신자로 한 방향으로 흐를 뿐이며, 그 사이에 이를 중개하는 시설도 따로 없는 라디오는 그러한 추적이나 공격으로부터 훨씬 안전하다. 정확한 정보와 자유로운 의사 전달이라는 현대 미디어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를 거의 언제나 충족시킬 수 있는 매체는 여전히 라디오밖에 없다.
“왜 라디오를 듣고 있나요?”
2018년 3분기 미국 및 캐나다의 연령대별 청취자들이 꼽은 라디오 선택 이유
내 목소리가 곧 라디오의 목소리
유네스코는 21세기의 라디오는 더 다양한 집단에게 더 다양한 프로그램과 관점 및 콘텐츠를 제공하고, 더 다양한 청취자의 요구를 반영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다양성을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두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그 목소리가 발화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들릴 수 있도록 해 주는 라디오의 능력은 특히 주류 미디어가 시장을 장악한 선진국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로 인한 피해가 대규모로 확산되던 미국에서는 각 지역의 소규모 라디오 방송국들이 지역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정확한 정보를 전하고 위기 극복을 위한 지역 차원의 연대를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콜로라도주 이냐시오(Ignacio)에 스튜디오를 두고 다섯 개 카운티에 걸쳐 방송을 내보내는 KSUT도 그 중 하나다. 방송 권역 내에 큰 규모의 원주민 인구를 두고 있는 KSUT의 태미 그레이엄(Tami Graham) 사장은 미국의 라디오 업계 정보 매체인 「라디오월드」와의 인터뷰에서 “지역 신문도 발행되지 않는 이곳은 뉴스의 사막지대였다”면서 “KSUT가 지역 뉴스의 공백을 메우면서 이제 사람들은 코로나19에 관한 것이든 산불에 관한 것이든 우리 방송에서 필수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믿을 만한 지역 정보는 오늘날 그 어느때보다도 더 중요하다”며 “사람들을 연결하고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하며 하고 있는 일”이라 덧붙였다. 그러한 활동이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2020년 KSUT는 팬데믹 상황에도 불구하고 역대 최고액의 방송국 기부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이처럼 믿을만한 목소리가 반드시 필요한 곳에서, 안전과 생존을 위한 정보가 반드시 전달돼야 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소외되거나 억압받는 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지키고 또 퍼뜨려야 할 상황에서 라디오는 여전히 유효하며, 여전히 소중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매체는 화려한 영상 매체에 곧 자리를 내줄 것처럼 보였지만, 21세기의 생명수라 할 수 있는 정보와 진실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달하는 데는 자유롭고 다양하게 퍼져나가는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라디오는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아직도 전 세계 30억 명*의 사람들이 매주 한 번은 지직거리는 잡음 너머로 들려오는 따뜻하고 정겨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가 아닐까.
* 2018년 딜로이트 추산 (출처: deloitte.com “Radio: Revenue, Reach, and Resilience”)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