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세계유산 해석
인류의 소중한 유산을 잘 보존해 후대에 전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세계유산 제도는 그 ‘해석’을 둘러싸고 국가 간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지난해 발간된 이슈 브리프 제5호 『평화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세계유산 해석』은 이러한 일을 방지하고 본래의 취지를 잘 살리기 위해 필요한 관점과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유산 제도는 유네스코의 대표 사업 중 하나다. 하지만 본래의 취지와 달리 몇몇 당사국이 유산이 지니는 어두운 역사를 은폐하거나 소수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포장된 가치만을 알리려는 시도를 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최근 일본 산업 유산 등재 과정에서 강제노동을 둘러싸고 불거진 한·일 갈등도 과거 역사를 유산 해석에 온전하게 반영하지 않음으로써 벌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유네스코가 지향하는 세계유산의 취지에 맞게 국제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공존과 지속가능성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슈 브리프에서는 평화로운 공존과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접근으로서 제도적 관점, 윤리적 관점, 실천적 관점에서 세계유산 해석의 의미를 정리했다.
첫째, 제도적 관점을 다룬 장에서는 세계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담론이 가지는 문제점을 짚어보고,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서 소홀하게 다루어진 로컬 가치(local value)에 무형유산과 기억 유산 등이 포함되며 유산화 과정을 통해 장소 정체성이 중요해지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특히, 세계유산 해석에서 유산의 특정 속성과 정체성만을 강조함으로써 공동체 해체와 갈등 유산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에 포용적 접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둘째, 윤리적 관점을 다룬 장에서는 지속가능성과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세계유산 해석의 중요성을 정리했다. 유산 해석에 지속가능한 발전이 통합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지역공동체의 정체성 형성과 사회적 참여를 통해 세계유산의 보존과 지속가능성이 확보된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즉, 세계유산을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이 다차원적으로 유산을 이해하면서 전체 공동체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이 지속가능한 발전의 계기가 되며, 일방적인 지식 전달이 아닌 쌍방향 의사 소통과 다양성 체험이 평화로운 공존에 있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셋째, 실천적 관점의 장에서는 일반적인 유산 해석과 세계유산 해석의 차별성을 다루고, 전통적이고 권위적인 유산 해석에서 시민과 공동체 중심의 다면적 유산 해석으로의 담론 변화를 논의하면서, 다면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여러 사례와 함께 살펴보았다. 세계유산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유산 해석법을 모든 공동체가 옹호할 가능성이 거의 없으므로, 유산 해석은 자유롭게 모든 집단과 공동체 등이 참가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유산 해석은 과정과 협력, 기억공동체를 중심으로 참여, 윤리의식, 포용성과 공감을 이루는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세계유산 해석을 둘러싼 갈등 해소를 위해 2021년 운영지침을 개정했다. 여기에는 예비평가 제도 추가, 진정성을 증명하는 속성으로서 정신과 감정에서 원주민과 지역공동체의 기억 서술, 기타 항목에서 국내외 갈등 상황과 조정안 포함 등이 들어 있는데, 이슈 브리프에서는 새 운영지침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내용도 제시했다. 첫째, 등재신청서 서술 항목에서 유산을 둘러싼 다양한 역사 해석의 갈등 등 문제를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인권에 반하는 범죄 등과 관련이 없음을 신청 당사국이 증명하도록 의무화하며, 예비평가 단계에서 대화와 갈등 해소를 위한 당사국 간 합의를 필수 요건으로 강화하면서 분쟁 해소 이전까지 등재 절차를 보류하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유산의 보존관리를 위해 원주민과 지역공동체의 로컬 가치를 반영하는 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의무화하고, 보존관리의 항목으로 넣어 제시하는 방안이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 진술문과 별개로 로컬 가치를 보유한 구성요소들의 속성을 파악하고, 문화적 중요성에 관한 진술문을 작성하여 보존관리에 활용함으로써 통합적인 보존관리가 이루어지도록 하며, 종합관리계획 수립에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와 로컬 가치를 함께 반영하도록 권고한다면 불필요한 갈등을 줄일 수 있다. 셋째,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제도나 세계기록유산 제도와 연계하여 유산의 가치를 재정립하도록 OUV 서술의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이다. 갈등 유산의 경우에는 국제양심유산연대(ICSC) 등과 협력하여 유산과 관련한 인권 탄압, 폭력 등의 문제 검토를 예비평가 조정절차로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유산 해석의 핵심 개념과 원칙도 살펴보았다. 이슈 브리프는 무엇보다 유산을 둘러싼 갈등이 강제노동, 인권 유린 등 장소와 관련한 기억을 언급하지 않거나 과거의 역사를 당사국 시각에서만 해석하기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따라서 장소에 기반하여 유산을 만든 환경과 시간 변화를 광범위하게 해석한다면 유산 자체에 한정하지 않고 종합적이고 다양한 시각을 유산 해석에 반영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장소와 관련한 다양한 유산 해석을 자료로 제시·전시하고, 방문객의 경험을 환류하여 유산 해석과 홍보에 이용하는 지침을 유네스코 차원에서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세계유산 해석 분야에서 한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세계유산과 관련된 기관, 전문가, 시민사회, 지역주민 등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이 국내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연대함으로써 세계유산 해석의 원칙과 기준 지침을 마련하고, 유네스코의 핵심의제를 실행적 차원에서 연결하여 모범사례를 선도적으로 발굴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최재헌 건국대학교 교수(문과대학 지리학과, 대학원 세계유산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