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과 기본을 돌아보게 해 준 유네스코학교 활동기
팬데믹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잠시 여유를 찾고있던 이준호 선생님이 유네스코학교 활동에 관한 원고를 부탁받고 떠올리게 된 단어는 ‘초심’(初心)이었다고 한다. 지극히 평범하지만, 흔들릴 때마다 정신과 마음을 잡아줄 수 있었던 그의 초심과 유네스코학교 활동은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본다.
좌충우돌의 시작
매년 유네스코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지도교사가 반드시 고민해야 할 것은 그해 활동을 대표할 주제를 정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유네스코학교 업무를 단독으로 맡게 된 2011년, 나는 ‘ESD를 위한 살기 좋은 건물 다문화 프로젝트’라는 다소 긴 문구를 제목으로 정했다. 그 전까지 원화여고의 ESD 활동은 학교 생활권에서 꽤 떨어져 있는 창녕의 우포 습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었기에 나는 좀 더 우리 생활 가까이에서 실천할 수 있는 활동을 모색하고 싶었다. 학교 근처 사업장 내에서 환경정화활동을 하고 거기서 수거한 일회용 컵이나 플라스틱 용기 등을 재활용해 친환경 재생화분을 만들고 이를 다시 기증하는 활동을 펼쳤다. 아울러 학교 인근에 거주 중인 외국인 공동체로부터 협조를 얻어 ‘외국인과 함께하는 문화교실’에도 동참했다. 하지만 ‘생태적으로 살기 좋은 건물’ 개념에 다문화까지 끼워넣은 그해의 활동은 좌충우돌 그 자체였기에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그 이듬해에 유네스코학교 활동 주제로 내세운 것은 좀 다른 의미에서의 ‘ESD’였다. 지속가능발전교육(Education for Sustainable Development)으로서의 ESD가 아닌, ‘생존가능발전교육(Education for Survivability & Development)’으로서의 ESD였다. 이건 또 무슨 말장난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녹색평론』을 처음 접한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시절에 이르기까지 나는 언제나 지속가능성의 본질에 대한 궁금증과 갈증을 갖고 있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욕망의 시대, 그리고 엔트로피(entropy)가 극에 달한 시대에 과연 우리는 지속가능하게 성장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안은 채 유네스코학교에 발을 들여놓은 만큼, 내가 생각하는 유네스코학교 활동의 핵심에는 지속가능발전교육이 놓일 수밖에 없었다.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환경과 경제, 사회는 각각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며,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 것일까. 공부를 거듭하면서도 여전히 알아낸 것은 없는 형국이었지만 나는 일단 이 세상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유네스코학교 교사로서의 유랑을 계속해 보고자 했다.
게센누마에서 목격한 우리의 의지
그러던 중 2012년 초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한일교사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동일본대지진의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게센누마(気仙沼) 지역을 방문하게 됐다. 지진 이전의 게센누마는 일본 유네스코 아시아 문화센터(ACCU) 활동의 핵심 지역으로 아름다운 리아스식 해안을 자랑하는 조용한 항구도시였다고 했다. 하지만 엄청난 수압에 엿가락처럼 휘어져버린 건물의 구조물과 초토화된 마을, 그리고 길이 60미터가 넘는 배가 거짓말처럼 도로 한 가운데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모종의 한계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지속가능성’을 보장받기 위한 ‘발전’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은 의문도 들었다.
하지만 사망 및 실종자 수만 1400명에 달하는 이곳에서 지낸 며칠 동안 나는 강인한 인간의 의지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스가와라 시게루(菅原茂) 게센누마 시장이 내게 건낸 명함에는 ‘바다가 있는 한 게센누마는 불멸’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바다 때문에 받은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진데, 그 매정한 바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남겨진 게센누마 사람들은 그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있는 대신 현재의 고통을 딛고 삶의 터전을 일으켜 세우는 강인한 저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게센누마 소학교 초등학생들의 놀랍도록 활기찬 일상에서, 그리고 전교생이 39명 뿐인 코하라기(小原木) 중학교 학생들이 열정적으로 선보였던 ‘소란 춤’(よさこいソーラン)을 통해 나는 대재앙이 이들의 삶에 대한 의지마저 꺾지는 못했음을 분명히 목도했다. 그리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불굴의 의지와 행동으로써 ESD를 실천해 나가야 함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나의 항해, 혹은 유랑은 정말 다양한 여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코로나는 우리의 일상을 뒤흔들고 교육 환경도 요동쳤다. 마스크는 뜨겁게 타오르던 유네스코학교에 대한 열정도 차갑게 차단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마냥 이렇게 얼어붙어 있을 수는 없다. 초심이 전해주던 그 열기는 아직 식지 않았다.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나고 있지만, 나는 초심과 더불어 2013년부터 이어오고 있는 ‘물사랑지킴이’ 활동을 통해 다시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렇게 나의 유랑은 ‘지속될’ 것이다.
이준호
원화여자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