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미디어와 표현의 자유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을 초래한 경찰의 불법적 폭력행사로 오랫동안 곪아왔던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가 다시 폭발했다. 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지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을 두고 다시 표현의 자유 논쟁이 불붙었다. 인터넷 시대, 자유와 규제 사이에서 우리는 어떠한 해법을 찾아야 할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기준
“사람들이 가득한 극장에서 거짓말로 불이 났다고 소리치는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줄 수는 없다.” 1919년 미국 사회주의당 총재 찰스 솅크가 미국인들을 상대로 ‘군의 징집명령을 거부하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뿌린 사건에 대해 올리버 웬델 홈즈 대법관이 한 말이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clear and present danger)은 표현의 자유 제한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뜻의 이 말은 미국에서 표현의 자유의 제한과 관련한 주제를 논할 때 자주 등장한다.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누군가의 자유로운 표현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는 데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소셜미디어 기업들 사이에 일어난 논쟁도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 위에 있다. 흑인 인권 옹호 시위대를 가장한 사람들의 약탈 행위에 트럼프 대통령은 “약탈이 시작되면 총격이 시작된다”는 말을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남겼는데, 이 문구를 두고 두 소셜미디어 기업은 정반대의 대처를 했다. 트위터는 트럼프 대통령의 게시물이 트위터 사용 규칙을 위반했다고 판단해 경고문과 함께 ‘가리기’ 처리를 한 반면, 페이스북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은 트위터에 분노했고, 트럼프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페이스북에 분노했다.
그런데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소셜미디어상 표현의 허용 범위에 대해 갖고 있는 기준은 서로 다르지 않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결정의 어려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 트위터는 지지자들에게 숨겨진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위 ‘도그휘슬’(dog whistle)을 즐겨 사용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게시물을 “약탈범들을 보면 총을 쏘라”는 메시지, 즉 폭력을 교사하는 행위로 판단했다. 하지만 페이스북의 해석은 달랐다. 트럼프가 사용한 문구는 1960년대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의 경찰서장이 “깡패들이 인권시위를 핑계로 범죄를 일으킨다”는 말을 하면서 처음 사용한 것이다.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는 당시 그 경찰서장이 의미한 것은 약탈범들을 경찰이 쏘겠다는 것이었으므로, 트럼프가 인용한 것도 과도한 경찰력을 사용하겠다는 의도로 비판을 받을 수는 있어도 폭력을 미화한 것으로 해석하기는 힘들다는 일종의 유권해석을 내렸다.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여론
저커버그의 이러한 결정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이전부터 그는 ‘궁극의 투명성’을 일관되게 주장해 온 인사다. 궁극의 투명성이란 ‘우리 모두가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말과 행동을 조심하게 될 것이고, 폭로가 일상화되면 다른 사람들의 실수에도 좀 더 너그러워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플랫폼의 개입, 혹은 필터링이 없이 누구나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된다는 것이 페이스북의 큰 그림이다.
물론 현실은 저커버그의 순진한, 혹은 급진적이며 방임적인 믿음대로 흘러가지는 않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데이터 분석업체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는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을 악용해 사용자들의 정보를 수집해 트럼프의 선거를 도왔고, 러시아 역시 미국의 유권자들을 분열시켜 트럼프의 당선을 유도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사용자들은 자유로운 주장을 펼쳤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의 커뮤니케이션은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을 통해 조심스럽게 조종되고 있었다. 즉, 소셜미디어는 사람들이 남긴 글을 지우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내용을 통제, 유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소셜미디어 기업들은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은 소셜미디어들이 알고리즘이나 직원의 개입을 통해 보수적인 주장의 확산을 인위적으로 억누르고 있다고 항의하고, 트럼프에 반대하는 진영에서는 소셜미디어 기업들이 트럼프의 문제 발언에 일반 사용자들의 발언과는 다른 기준을 적용해서 그대로 두고 있다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댓글 논란과 인터넷 비즈니스의 탄생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논쟁이 소셜미디어 기업들이 생겨나기 한참 전인 1990년대 초에 이미 있었다는 사실이다. ‘컴퓨서브’와 ‘프로디지’라는 인터넷 초창기의 두 기업은 당시 사용자들이 웹사이트 내 포럼에 남긴 댓글과 관련한 명예훼손 소송에 걸렸다. 비슷한 사건이었지만 법원의 판결은 달랐다. 사용자들의 글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방치했던 컴퓨서브는 책임이 없지만, 사용자들의 글이 도를 넘을 경우 삭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 ‘언론매체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라 판결받은 프로디지는 웹사이트에 올라오는 글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두 판결은 기업들에 ‘관리하면 오히려 책임이 따른다’는 역(逆)인센티브를 주었고, 인터넷은 음란물과 쓰레기 콘텐츠가 넘쳐나는 공간이 되기 시작했다. 미 의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 법안(통신품위법 230조)을 만들었다. 이 법안의 요지는 ‘사용자들이 올린 내용을 가지고 인터넷 기업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테니 플랫폼에 올라온 내용을 적절히 관리하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 법안을 21세기 소셜미디어 기업의 존재조건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인터넷의 미래를 결정한 중요한 법안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1919년에 올리버 웬델 홈즈가 사용한 비유가 표현의 자유 제한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처럼, 1996년에 만들어진 법안이 2020년 소셜미디어 기업의 콘텐츠 개입 기준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법적인 책임을 면하는 조건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게 했지만 모호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결국 트위터의 제재에 분노한 트럼프는 통신품위법 230조를 개정하겠다며 행정명령을 내렸고, 민주당 대선 후보 조 바이든 역시 소셜미디어 기업들이 무책임하다며 230조를 개정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1백년 전의 논란이 사회당 당수의 전단지를 둘러싼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논란은 대통령의 소셜미디어 사용을 두고 벌어지는 일이다. 표현의 자유와 공동체의 이익은 공존할 수 있는가. 시대가 바뀌고 사용된 매체도 달라지지만, 결국 우리는 여전히 표현의 자유와 그것의 제한이라는 같은 문제를 다른 방법으로 변주할 뿐이다.
박상현 사단법인 코드 미디어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