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장 안팎에서 실감하는 노래의 힘
유네스코 총회가 있는 11월은 유네스코 본부에서도, 대한민국대표부에서도 모두가 분주하게 보내게 되는 달입니다. 저 역시 몸과 마음이 때로 지치는 시간이었지만, 회의장 안팎에서 마주한 노래들 덕분에 잠시나마 여유를 찾기도 했습니다. 아바의 노래 제목 대로, “Thank you for the music”을 절로 되뇌이게 되었던 그 순간들을 기록으로 남겨 보았습니다.
이번 제42차 유네스코 총회에서는 루마니아의 시모나-미렐라 미쿨레스쿠(Simona-Mirela Miculescu) 대사가 의장으로 선출됐습니다. 마쿨레스코 신임 의장이 인사말을 하고 나자 루마니아 가수 두 분이 무대에 올라 축하 공연을 펼쳤습니다. 처음 들어본 루마니아 노래는 애잔한 선율이 인상적이었고, 그래서인지 노래가 끝난 후 다시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될 때 회의장의 공기는 훨씬 부드러워진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유네스코 회의장에서 노래를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지난 5월에 열린 제216차 집행이사회 폐회식 때가 특히 기억에 남는데요. 사무실에서 온라인 생중계를 시청하며 회의를 모니터링하고 있었던 저는 폐회가 선언된 후 동영상 창을 닫으려 했습니다. 그때 의장이 파라과이 대사에게 노래를 요청했고, 파라과이 대사가 그것을 혼쾌히 받아들여서 깜짝 놀랐습니다. 곧이어 반주 음악이 흘러나오고 회의장 스크린에는 노래 가사가 띄워졌습니다. 좀전까지 크고 작은 이슈로 날을 세우며 토론했던 정부 대표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박수를 치는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보기 좋았습니다. 파라과이 대사가 부른 노래는 아마도 스페인어 노래 중 가장 유명한 곡인 베사메 무쵸(Besame mucho)였습니다. 그 노랠 들으면서 언젠가 한국 노래를 함께 부를 날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는데요. 그 날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오게 됐지요.
나중에 전해 듣기로, 가수 경력도 갖고 있는 파라과이 대사는 주요 회의 마지막에 노래를 곧잘 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5월에 이어 10월 집행이사회 때도 어떤 노래를 듣게 될까 궁금해했었는데, 당시 회의는 이스라엘군이 한창 가자 지구를 폭격할 때 열린 회의였기에 참석자들은 노래 대신 개회식과 폐회식 때 1분간 묵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상황의 엄중함을 고려할 때 당연한 결정이었고, 그러면서도 조금은 아쉽기도 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열린 집행이사회였지만 중간에 아주 잠깐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집행이사회의 분과 회의 중이었는데요. 마침 그날이 해당 세션 의장의 생일이었는지, 회의 참석자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무반주로 짧게 부르며 축하를 했습니다. 이때도 딱딱한 회의장 분위기가 잠깐이나마 편안하게 바뀌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게 바로 노래의 힘이겠지요.
앞서 회의 참석자들이 한국 노래를 함께 부를 날을 상상했었던 저는 이번 총회 기간에 열린 청년포럼에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청년포럼의 특별 세션에서 케이팝 그룹 세븐틴이 공연을 펼쳤고, 본부와 대표부 직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한국어 가사를 어색하게 발음하면서도 너무나 흥겹게 노래들을 ‘떼창’하는 장면이 너무나 신기하고도 멋졌습니다.
사실 저 역시도 지난 9월부터 동네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음악이 주는 기쁨과 위안을 직접 경험하고 있답니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합창단을 해 본 적도 없지만, 눈을 질끈 감고 합창단 문을 두드려 봤는데요. 마침 처음 연습한 곡이 제가 좋아하는 영화 ‘코러스(Les Choristes)’의 수록곡인 ‘Vois sur ton Chemin(당신의 길을 봐요)’이어서 즐겁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합창단 연습이 있는 매주 수요일 저녁은 어느새 제가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됐을 정도예요.
대부분이 전문 음악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기에 합창단원들의 음정은 늘 흔들리고, 화음은 뒤섞이고, 박자는 틀리기 일쑤지만, 그렇게 엉망인데도 노래를 집중해서 부르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돼서 매번 놀라게 됩니다. 아주 가끔 꽤 그럴듯한 화음을 이뤄서 음악이 만들어질 때는 짜릿한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올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캐롤 몇 곡을 포함해 그간 연습했던 곡들을 선보이는 작은 공연도 준비하고 있는데요. 부디 큰 실수만 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파리는 흐리고 스산합니다. 가끔 해가 비치기도 하지만 한국보다 낮이 짧고 비도 자주 옵니다. 우산을 쓰고 어두운 퇴근길 거리를 걸으며 저는 가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노래 ‘Confidence’의 이 구절을 흥얼거리며 힘을 내곤 합니다. “나는 햇살을 믿어요. 나는 비를 믿어요. 나는 봄이 다시 올 거라 믿어요.”(I have confidence in sunshine. I have confidence in rain. I have confidence that spring will come again.)
홍보강 주유네스코 대한민국대표부 주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