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전쟁과 폭력의 역사에 대해 어떤 이는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이제 그만 떠나보내자고 한다. 하지만 이 둘은 결국 같은 뜻을 품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임마누엘 칸트가 “Remember to forget!”이라 했듯, 우리는 지나간 전쟁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잘 기억하는 동시에 잘 잊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잊고, 또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할까.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는 형제의 상 근처의 오후 풍경. 전쟁을 경험한 세대보다 그렇지 못한 세대가 더 많아진 세상에서, 우리는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또 잊어야 할까(Yeongsik Im / Shutterstock.com)
잊어야 할 것 — 지식이 ‘힘’이라는 오래된 믿음
지식을 축적해 대를 이어 전달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도구와 기술을 개발해 사용함으로써 인류는 역사상 최단시간 만에 지구의 지배종이 됐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그래서 어떤 격언보다도 우리에게 더 자연스럽고 당연한 말로 들린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지식과 기술이 곧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와 우리의 삶을 더 편리하게 만드는 수준을 넘어, 다른 생물종을 절멸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하며, 나아가 다른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 쓰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인류가 새로 습득한 지식이 쌓여가는 속도는 그 어느 때보다 빨라졌다. 앞서가는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 간의 격차도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식이 곧 힘이라는 믿음 하에서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에 지식을 조건 없이 나눠주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18세기 이후 압도적으로 발달된 총포와 측량, 공업 생산과 항해술을 앞세운 유럽 열강은 대양 너머 미지의 대륙으로 건너가 원주민들과 지식이나 문화를 교환하는 대신 그들의 터전과 목숨을 빼앗았다. 지식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단해 다른 이를 억압하는 근거로 활용하는 일도 벌어졌다. 생명의 발생과 진화의 뿌리를 파고들었던 다윈의 기념비적인 연구는 많은 이들에게 ‘약육강식은 자연의 섭리’라 여겨졌고, 이는 ‘더 나은 민족을 위해 그렇지 못한 민족을 말살해야 한다’는 나치의 광기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뿐 아니다. 원자핵이 쪼개질 때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 지식을 유사 이래 모든 인류의 숙원이었던 에너지 문제 해결을 위해 쓰기보다는 전범국의 하늘에서 폭탄을 터뜨림으로서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고 그들을 응징하는 쪽을 택했다.
지식에 대한 유네스코의 새로운 정의
그렇게 지식이 힘이 되고, 그것이 나 자신이나 우리 민족만의 힘이 되어 이를 갖추지 못한 사람을 억압하는 일이 인류의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와중에 탄생한 유네스코는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그저 ‘힘’으로만 여기던 오랜 믿음을 우리 머릿속에서 지우고자 했다. 2차대전이 끝난 직후 유네스코 창설을 위해 한 자리에 모인 지식인들은 교육과 문화의 교류를 통해 상호 이해를 넓히며, 특히 새로운 지식이 배타적이고 비윤리적인 힘으로만 사용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데 뜻을 같이 했다. ‘아는 것은 힘’이라는 말 대신, ‘아는 것을 윤리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기억하자는 뜻이다. 1945년 11월 16일 영국 런던에서 유네스코 헌장을 채택하는 자리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한 르네 카생(René Cassin)은 “양심 없는 과학은 단지 영혼의 폐허일 뿐”이라는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의 말을 인용하며 “윤리 없는 지식은 단지 야만을 낳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새로이 창설되는 유네스코와 유네스코의 활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지식이라는 개념에 뭔가 다른 것을 더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 다짐하며, 그것은 “위대한 이상, 세계 평화를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한 선명한 비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아의 완성(mastery of self)”이라고 했다.
전 인류가 새로운 지식을 오로지 이익 실현이나 힘을 투사할 수단으로만 사용해 온 습관을 지워내는 여정은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 유네스코 스스로도 1985년도 『꾸리에』를 통해 유네스코 헌장 채택 순간을 ‘이상의 탄생’(Birth of Ideal)이라 묘사했듯, 그 비전과 활동이 순진한 이상이라거나 실현 불가능한 계획일 뿐이라는 일각의 비판 속에서도 유네스코는 75년이 넘도록 그 일을 꿋꿋이 해 왔다. 덕분에 오늘날 인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잠재력을 갖고 있는 여러 새로운 지식의 도입과 확산 과정에서 유네스코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들리고 있다. 예를 들어 2021년 유네스코는 「인공지능(AI) 윤리 권고」와 「오픈 사이언스 권고」를 채택하면서 가공할 힘을 갖고 있는 새로운 지식과 기술이 오로지 자본, 특정 기업이나 국가의 이익, 나아가 일부 사람만을 위한 힘이 되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기억하자고 제안했고 세계 각국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유네스코가 이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의 활용 과정뿐만이 아니라 연구와 개발 과정에서부터 윤리와 포용, 평등을 중요하게 여겨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더 다양한 주체가 지식의 발견과 축적 및 개발에 관여하고, 더 많은 곳에서 그것을 활용할 수 있게 되고, 그 결실을 모두가 공평하게 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아는 것은 힘’이 아니라 ‘아는 것이 곧 평화와 공존의 길’임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1946년 7월 25일 미국이 남태평양 비키니 섬에서 실시한 핵무기 실험 장면. 새로운 지식과 과학기술이 오로지 힘으로 여겨지는 한, 인류는 전쟁과 폭력의 역사를 멈출 수 없을지도 모른다 (미 의회 / 국방부 공개 사진)
윤리와 이성만으로 평화를 완성할 수 있을까
유네스코의 바람 대로 합리적이고 온화한 이성과 윤리에 기반해 지식을 공유하고 활용하는 날이 온다면 인류는 마침내 전쟁과 폭력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역사를 되돌아보면, 비록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부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식과 이성의 발달에 힘입어 조금씩 더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를 만들어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인류는 시민들의 손으로 노예제를 철폐하고 투표권을 확대했고, 법과 제도를 정비해 범죄와 폭력과 차별이 더는 공공연하게 나올 수 없는 사회를 세계 곳곳에서 만들었다. 그러한 사회 발전에 대해 가장 희망적인 믿음을 내비치는 학자 중 한 명이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하버드대 교수다. 2011년에 출간한 세계적 베스트셀러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핑커 교수는 “믿거나 말거나 폭력은 긴 세월에 걸쳐 감소해왔고 오늘날 우리는 우리 종이 존재한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쳤다. 유사 이래 폭력에 의한 살인사건 비율이나 단위 인구 당 전쟁 사망자 수 등의 데이터를 살펴봤을 때, 중세 이전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체 인간 세상의 폭력은 지속적으로 감소해 왔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21세기의 세상은 평화와는 거리가 한참 멀게 느껴진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략했고, 중동과 아프리카 곳곳에서는 테러와 사고가 빈발하며, 선진국에서도 평화로운 일상이 끔찍한 총격 사건 현장으로 돌변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그래도 지금이 중세보다는 훨씬 낫잖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윤리와 지성의 발전에 힘입어 인류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시기를 누리고 있다는 핑커 교수의 주장은 틀린 것일까. 혹은, 지금 우리가 열망하는 ‘평화’란 핑커 교수가 말한 ‘전쟁과 폭력의 감소’와는 뭔가 다른 점이 있는 게 아닐까.
전쟁의 부재가 곧 평화라면 인류는 핑커 교수의 주장대로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합리적인 이성의 힘으로 계속 그 시기를 연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지구를 몇 번이고 멸망시킬 수 있는 핵무기를 쌓아놓은 우리에게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이란 곧 공멸을 뜻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차대전의 참화 속에서 인간의 마음에 평화의 방벽을 쌓고자 유네스코 창설에 나선 사람들이 생각했던 평화란 그저 전쟁과 폭력의 부재가 아니다. 핵무장에 의한 대치만으로도 유지될 수 있는 ‘겨우 그 정도’의 평화가 목적이라면, 국제기구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쏟아부은 그간의 노력은 애초에 인력과 자원의 낭비였는지도 모른다.
영국 런던 사우스뱅크에 있는 국립 코로나19 추모벽(National Covid Memorial Wall).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의 모습은 전쟁이 사라진다고 해서 곧 평화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있다(John Gomez / Shutterstock.com)
잊지 말아야 할 것 — 연대하는 세계시민이 만드는 평화
요즘 청년들이 자주 쓰는 줄임말 중에 ‘누칼협’이란 말이 있다. ‘누가 칼 들고 협박했니’라는 뜻이다. 유네스코가 지난 전쟁과 폭력의 역사로부터 반드시 기억하고자 하는 것 중 하나는 ‘누가 칼 들고 협박하는’ 상황만이 폭력은 아니며, 그것이 사라진 상황이 곧 평화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은 칼 들고 협박하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거대한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 계층 간 격차, 물질만능주의와 환경 파괴로부터 나온다. 이들이야말로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우리 존재를 위협하며, 좁은 의미의 전쟁과 폭력이 줄어든 세상에서 훨씬 강력한 힘으로 인류를 평화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불평등이나 전 지구적 재난이라는 폭력 앞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실수하고, 또 실패하는 사람들에게 ‘누칼협’이라며 ‘이성적으로 생각했어야지’라고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낼 수 없다.
지난 3년여 동안 전 세계에서는 689만 명이 코로나19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전쟁이나 폭력이 아니라 질병에 따른 희생자이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들 중 상당수가 단지 운이 없거나 백신 접종이나 병원 치료를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이러스의 확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는 데 동의한다. 달리 말해 이들은 계층 및 국가 간 불평등과 사회적 격차, 그리고 국제사회에서의 자국 우선주의라는, 오늘날 이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또 다른 폭력의 희생자다. 이 새로운 형태의 폭력, 새로운 개념의 전쟁에 대응하는 데는 단순히 지나간 전쟁과 폭력의 역사적 사실만을 기억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유네스코는 지나간 전쟁과 폭력의 역사를 막지 못한 원인이 다름 아닌 우리의 분절된 마음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을 때, 새로 다가올 위기에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상호 이해와 연대를 통해 ‘우리’의 테두리가 조금만 더 넓었다면 과거의 많은 전쟁과 폭력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찬란한 문화유산과 유구한 전통과 빼어난 지식과 기술이 오로지 ‘내 것’, ‘우리 민족의 것’이 아니라, 지구라는 이 좁은 세상을 살아가는 시민 모두의 것임을 기억했다면 더 많은 전쟁과 폭력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화해를 한 뒤에도 그간 ‘우리’의 범주는 충분히 넓어지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범주를 넓혀 평화를 갈망하고 서로 연대하는 마음을 만들어 나가는 일을 더는 늦출 수 없는 시점이 됐다. 지금의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거대한 폭력, 즉 기후변화와 심각한 불평등, 교육과 지식 격차 등의 문제는 특정 국가나 집단이 아니라 인류라는 단일한 시민이 함께 싸워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는 누구도 뒤처지지 않는 교육을 통해 이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각자가 행동과 권리 행사에 필요한 지적인 힘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시각을 더욱 보편적인 차원으로 넓히는 동시에, 그것을 더욱 포용적이며 상호 존중의 정신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함께 나눌 것을 강조하고 있다. 더불어 거짓과 혐오가 우리의 눈을 가리기 전에, 비판적 성찰과 진실의 빛이 이 세상을 비출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결국 ‘세상 모든 일이 우리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그 단순한 진리를 모두 함께 기억하고 실천토록 하기 위해, 유네스코는 오늘도 과거를 기억하고, 또 지속가능한 미래를 함께 그려보고 있다.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