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맹렬한 기세는 전 세계에 있는 유산의 안녕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산의 보존관리 및 신규 유산 등재 등을 위한 유네스코와 자문기구의 현장답사도 취소 혹은 연기된 가운데, 당초 2020년 7월 중국 푸저우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도 1년 연기되어 2021년 온라인으로 개최됐다.
코로나19는 세계유산에도 적지 않은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의 보고에 따르면, 작년 4월 기준 전 세계의 세계유산 지역 중 90%가 문을 닫거나 제한관람을 실시했으며, 올 2월에도 여전히 71%의 세계유산 지역이 제한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13%의 세계유산 관련 기관에서 직원들이 해고되었으며, 관광객 감소로 지역 경제가 절망적인 타격을 입었다. 생계가 어려워진 지역주민이 밀렵, 불법 벌목 및 채광, 도굴 등에 나서면서 세계유산의 보존과 관리를 위한 시스템에 구멍이 뚫렸고, 곳곳에서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의 보존에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
16일이라는 예외적으로 긴 회기 동안 세계유산협약에 가입한 196개국을 대표해 선출된 21개 위원국은 ▲코로나19 상황에서의 세계유산 보호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세계유산 보존 현황 보고서 채택 ▲신규 세계유산 등재 심사 ▲기후변화와 세계유산 등 총 18개 의제에 대해 열띤 논의를 펼쳤다. 이번 회의에서 한국의 갯벌을 포함해 자연유산 5건, 문화유산 29건 등 총 34건의 유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됐고, 이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문화유산 897건, 자연유산 218건, 복합유산 39건 등 1154건에 달한다.
‘한국의 갯벌’은 지난 5월 자연유산 심사 자문기구인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으로부터 ‘반려’ 권고를 받았으나, 22종의 멸종위기 동식물을 포함해 약 2150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생물다양성의 보고이자, 세계에서 가장 위협받는 철새 이동경로 중 하나인 ‘동아시아-대양주 철새 이동경로’의 중간기착지로서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자연유산이라는 점을 위원국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설득한 끝에 다수 위원국의 지지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됐다. 갯벌 등재와 함께 한국이 가장 큰 관심을 둔 의제는 역시 ‘일본근대산업유산 보존관리 현황보고’였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근대산업유산 등재 당시 일본 정부의 약속이나 위원회의 결정 사항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데 대해 ‘강한 유감’을 표하고 시정 조치를 권고함으로써 일본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이번 위원회에서는 역대 세 번째로 세계유산목록에서 삭제된 유산이 등장했다. 그 대상은 지난 2004년에 등재된 영국의 ‘리버풀-해양산업도시(Liverpool — Maritime Mercantile City)’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항만지구와 북부 부두 지역 및 완충지에서 지속된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로 인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는 보고를 올린 바 있다. 논의 과정에서는 ‘영국 정부에 해결할 시간을 주자’는 호주, 브라질, 남아공, 에티오피아 등의 의견과, ‘세계유산협약의 신뢰도를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라는 노르웨이, 바레인, 중국 등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결국 비밀투표를 거쳐 삭제가 최종 결정되었다.
특히 이번 세계유산위원회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들이 ICOMOS, IUCN 등 자문기구의 권고를 따르지 않는 모습을 빈번히 볼 수 있었다. 신규 등재 심사 대상 36건 중 자문기구의 심사과정에서 ‘반려’, ‘보류’ 및 ‘판단불가’ 권고를 받은 18건 중 16건이 등재에 성공했으며, 호주와 이탈리아, 헝가리, 네팔의 유산을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올릴 필요가 있다는 자문기구들의 권고는 단 한 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민사회와 자문기구는 이러한 경향에 대해 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 사업의 궁극적 목적과 의의를 퇴색시키는 것은 물론 사업이 갖는 국제적 위상마저 약화시킬 수 있는 문제라며 우려를 표했다.
세계유산을 보존하고 보호한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된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것을 넘어 지역사회에 활기를 불어넣고,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 간에 대화의 기회를 제공하며, 더 나은 세상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일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처음에는 길게만 느껴졌던 16일간의 회의가 오히려 짧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회원국들이 이번에 드러난 문제점이나 미흡한 부분을 더욱 치열히 논의하고 개선해, 내년으로 50주년을 맞는 세계유산협약이 유네스코 헌장의 세계 평화와 인류 발전에 기여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더욱 충실히 실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장자현 문화팀 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