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차 유네스코 총회 참가 기고문 │
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장,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문화·정보커뮤니케이션분과위원장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총회 문화분과위원회 현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제 문화가 국제협력의 중심축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 자리였다고 할 수 있다. 문화는 더 이상 예술과 나란히 하는 한 분야가 아니라, 공동체의 신뢰와 사회적 회복력을 떠받치는 토대이며 평화와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는 구조적 요소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총회 문화분과위원회는 2026–2029년 문화 분야 사업 및 예산(43C/5)을 중심으로, 디지털 전환에 따른 문화다양성과 언어권 보호, 기후위기 및 분쟁 상황 속 문화유산 보존, 불법 문화재 거래 대응, 문화·예술교육 강화 등 다양한 의제를 논의한 자리였다. 특히 회원국들은 문화야말로 기술 격차와 지역 불평등, 혐오의 확산과 전쟁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인권을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이라는 데 대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회원국들은 문화정책이 더 이상 선언에 머물러선 안 되며, 구체적인 권리 보장과 제도 설계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데 공감을 표했다.
이러한 흐름은 최근 유네스코가 개최한 세계 문화정책 및 지속가능발전 회의에서 제시된 방향성과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문화는 글로벌 공공재이며, 기술과 환경, 경제와 평화의 교차지점에서 인류 공동의 미래를 설계하는 핵심 자원이라는 인식이다. 문화는 기억이나 가치를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처입은 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회복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화가 국제규범의 언어로 자리할수록 우리가 마주해야 할 딜레마도 분명해진다. 보편주의는 존엄과 평등이라는 기준을 제시하지만, 동시에 특정 문명권의 가치만을 ‘보편’으로 자리매김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와 반대로 문화상대주의는 다양성을 존중하지만, 문화의 특수성이라는 이름으로 인권침해까지 정당화하는 것에서는 정당성을 가지기 어렵다. 인간의 존엄은 언제나 문화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과제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인간의 권리를 제약하거나 침해하지 않는 다양성과 그 다양성을 억압하지 않는 보편성을 어떻게 공존하게 만들 것인가.
헌법은 문화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러나 그 자유는 모든 인간의 존엄이라는 가치 아래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문화는 자유의 산물이자, 동시에 그 자유를 유지시키는 제도적 기반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문화정책은 인간의 존엄이라는 최고의 가치 아래 자유와 책임, 권리와 윤리의 균형 위에서 설계되어야 한다.
칼레드 엘-에나니 신임 사무총장이 유네스코가 ‘문화적 가교’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는 시대에 서로의 삶과 기억을 이해하는 문화적 접근이 협력의 지속가능한 토대임을 환기시킨 것이다. 이번 총회에서 논의된 여러 규범 과제들 역시 결국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문화가 국제사회에서 수행해야 할 본질적 책무를 새삼 일깨워주었다.
한국은 디지털 문화유산 보존, 창작 생태계 강화, 미디어 접근성 확대 등에서 문화적 기반을 탄탄히 다져 왔다. 이러한 경험은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쌓는 소중한 자산이다. 과장된 역할보다, 강점을 살린 책임 있는 협력이야말로 문화적 리더십의 가장 단단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총회가 열린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도 과거 문명들이 수 많은 부침을 겪으면서 서로의 삶을 교류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해온 도시다. 40년 만에 파리 밖의 장소에서 열린 이번 총회의 장소 역시, 문화를 바탕에 둔 평화롭고 조화로운 미래에 대한 유네스코의 의지를 다시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문화는 인류가 ‘함께’ 서 있을 수 있는 마지막 기반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기반을 지키는 데 있어, 한국은 책임 있는 동반자로서 더욱 큰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