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차 유네스코 총회 참가 기고문 I
고상원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인문사회·자연과학 분과위 부위원장위원장

지난 11월 초, 사마르칸트에서 열린 유네스코 총회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집행위원 자격으로 참석하면서 가장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유네스코에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이었다. 특히 신임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이집트 출신 칼레드 엘-에나니가 연단에 올라 아랍어로 연설을 시작한 뒤 자연스럽게 영어와 프랑스어로 이어가던 장면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는 단순한 언어 구사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유네스코가 문화다양성, 다언어성, 새로운 포용성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겠다는 선언적 메시지이기도 했다.
고고학자·박물관장·교수·장관을 거친 경력을 가진 엘-에나니 사무총장은 교육·과학·문화·커뮤니케이션이라는 유네스코 4대 분야가 ‘현장에서 사람을 중심에 두는 조직’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유네스코가 더 이상 선언적 이상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 실행과 구체적 결과를 중시하는 기관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방향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번 총회에서 눈에 띈 점은 여러 회원국이 유네스코를 다시 ‘생각의 실험실(laboratory of ideas)’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유네스코의 지적 리더십이 다소 약해졌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2021년 AI 윤리 권고에 이어 올해 신경기술 윤리 권고까지 채택되면서 유네스코가 여전히 국제 규범을 제시하고 세계적 논의를 이끄는 중요한 플랫폼임이 확인되었다. 기술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일수록 신기술의 윤리 기준을 다자 협의의 틀 안에서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유네스코는 최근의 두 권고 채택을 통해 다시금 존재의 이유를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새로운 현실도 마주하고 있다. 미국은 다시 유네스코 탈퇴를 선언하며 이미 분담금 납부를 멈춘 상태다. 유네스코가 오랜 기간 미국의 재정적·정치적 기여에 일정 부분 의존해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단순한 재정 문제가 아니라 국제기구 운영의 신뢰와 구조적 균형에도 영향을 미치는 변화다. 그렇다고 해서 유네스코의 주요 공여국 중 하나인 한국이 미국이 남긴 부담을 과도하게 떠안을 필요는 없다. 미국의 공백을 대체하거나 민감한 의제를 앞장서 수용하는 방식은 한국의 외교적 위치에 적합하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변화한 환경을 정확히 읽고, 그 속에서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적절한 역할을 세심하게 판단하는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이 유네스코를 바라보는 시각은 보다 현실적이면서도 전략적일 필요가 있다. 한국은 이미 경쟁력을 보유한 AI 윤리, 신경기술 윤리, 디지털 전환, 문화유산의 디지털 보존 등의 분야에서 유네스코와 협력을 강화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이 축적해 온 교육정책과 과학기술정책 경험은 유네스코가 강조하는 ‘사람 중심 접근’과 잘 맞닿아 있으며, 이는 과도한 정치적 부담 없이 기여할 수 있는 적절한 영역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과장된 역할이 아니라, 한국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신뢰를 쌓는 실질적 기여다.
요컨대 이번 사마르칸트 총회는 미국이 한 발 물러선 가운데 아랍 출신 사무총장이 취임하며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무대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배경과 구성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막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굳이 무대를 대체하거나 주도하려 할 필요는 없다. 다만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설 수 있는 위치를 정확히 찾고,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새로운 유네스코 시대가 열리는 지금, 한국은 과도하게 나서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강점이 빛날 수 있는 지점에서 묵직한 기여를 이어가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유네스코라는 무대 위에서 한국이 선택해야 할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