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내놓으실 건가요? 배달의 민족도, 하얀 옷의 민족도 답이 될 수 있겠지만, ‘호랑이의 민족’도 빠질 수 없는 대답 중 하나일 겁니다. 한 번 포효하면 백두대간부터 만주, 그리고 드넓은 시베리아까지 떨게 만들었던 호랑이를 우리 민족은 누구보다 사랑하고 또 경외했었으니까요.
안타깝게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숲에서는 더이상 호랑이의 포효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몇 년 사이, 전 세계 문화계에서는 ‘K-호랑이’가 다시금 존재감을 키워 왔는데요. 먼저, 전 세계인의 마음을 빼앗아버린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더피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죠. 더피의 모델이 된 조선시대 민화 속 호랑이는 이제 한국 관광객들의 최고 인기 ‘뮷즈(박물관 기념품)’가 되어 구매 예약조차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뿐인가요. 2024년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작은 땅의 야수들》에서도, 2021년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뉴베리상을 수상한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에서도, 우리의 기억과 문화에 바탕을 둔 K-호랑이들은 각기 다른 문화적 상징과 의미, 그리고 21세기적 시사점을 갖고 글로벌 무대를 누비고 있습니다. 마음 같아선 독자들께 까치호랑이 뮷즈를 돌리면서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은데요. 대신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이 K-호랑이들의 남다른 상징과 이야기들을 통해 여러분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몬디아컬트(MONDIACULT) 회의의 주요 주제들 속으로 안내합니다.
* 이번 뉴스레터는 MONDIACULT 공식 홈페이지와 전진성 한국유네스코연구소장의 글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이슈쿠키 미리보기🔎 I 전 세계 문화정책의 이정표, 몬디아컬트(MONDIACULT)란?
‘유네스코 세계 문화정책 및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회의(World Conference on Cultural Policies and Sustainable Development)’라는 긴 이름을 갖고 있는 몬디아컬트(MONDIACULT)는 194개 회원국의 문화 정책 리더와 관계자, 시민사회 구성원들이 모여 문화 분야의 글로벌 의제를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올해 몬디아컬트 회의는 9월 29일부터 10월 1일까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는데요. 이번 회의에서 회원국들은 2022년 멕시코시티 회의에서 채택된 ‘몬디아컬트 선언’의 이행을 점검하고, 문화 분야의 6개 우선주제(▲문화권(Cultural rights) ▲문화 영역에서의 디지털 기술(Digital technologies in the culture sector) ▲문화와 교육(Culture and education) ▲문화 경제(Economy of culture) ▲문화와 기후행동(Culture and climate action) ▲문화, 유산, 위기상황(Culture, heritage and crisis))와 2개 관심영역(▲평화를 위한 문화(Culture for Peace) ▲인공지능과 문화(AI and culture))에 대해 의견을 나눴습니다. 전문가의 시선을 통해 분석한 회의의 주요 결과물과 그 의미는 오는 10월 23일자 ‘유네스코 Talks’를 통해 한번 더 정리해 드릴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작은 땅의 야수들》의 호랑이와 ‘문화권’
작년 10월 10일(현지시각),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되던 그날 러시아의 레프 톨스토이 박물관은 김주혜 작가의 《작은 땅의 야수들》을 2024년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했습니다. 우리나라로선 겹경사를 맞은 셈이었는데요. 일제강점기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옥희, 그리고 호랑이 사냥꾼의 아들로 태어난 정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에서 ‘야수들’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는 용맹하고 끈질긴 조선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선명한 줄무늬와 함께 책 표지를 장식하는 호랑이는 사실 소설 맨 첫 부분에만 등장할 뿐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장교에게 극한의 공포감을 안겨주었던 호랑이의 위엄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어려운 세상을 헤쳐 나가는 주인공들의 뒤에 든든한 후광처럼 자리합니다.
소설에서 악랄한 일본군 장교 하야시가 호랑이 사냥에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값비싼 호랑이 가죽과 맹수 사냥의 명예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더 크게는 호랑이라는 영적 동물에 깃든 조선인의 정신, 즉 조선의 ‘문화’를 완전히 말살하려는 의도가 있었죠. 조선을 문화적으로도 완전히 복속시킬 때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도 불가역적으로 완성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결국 그 호랑이를 잡지 못했듯 현실에서 조선의 문화는 일제의 온갖 말살 정책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로 묶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열망과 존엄을 지켜주었습니다. 나아가 식민 지배와 전쟁을 극복하며 번영하고 또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바탕이 되었죠. 김구 선생이 꿈꾸던 ‘문화 강국’에 성큼 다가가 있는 오늘날까지 말이지요.
호랑이처럼 강인했던 우리의 문화가 그랬듯, 문화란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적 성취뿐만 아니라 사회적 결속에도 크나큰 힘을 발휘하는 요소입니다. 유네스코가 이번 몬디아컬트에서 ‘문화권(Cultural rights)’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왜 그냥 ‘문화’가 아니라 문화‘권’일까요? 여기에는 오늘날 문화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과 논의의 결과가 담겨 있습니다. 그저 같은 정체성과 전통을 향유하는 것을 넘어, 이제 문화는 인간의 기본권 중 하나로서 윤리적·사회적·경제적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가치를 더 잘 가꾸어 나가기 위해, 누구나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다양성과 형평성을 증진하고 불평등을 완화시켜줄 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합니다. 그 범위는 소수자와 토착 공동체의 문화적 실천과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일에서부터 문화 분야 창작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정말 넓은데요. 이번 몬디아컬트에 모인 194개 유네스코 회원국 대표들은 이를 위해 필요한 법적 체계와 정책을 적극적으로 마련해 나갈 것도 약속했습니다.
+ ‘케데헌’의 까치호랑이와 디지털 시대의 문화
양쪽이 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듯한 묘한 눈동자, 웃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기기묘묘한 표정, 위협적이기도 우스꽝스럽기도 한 삐뚤빼뚤 이빨. 2025년 하반기 넷플릭스의 화제작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에서도 가장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호랑이 더피는 디지털 도구를 통해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재구성되는 오늘날 문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캐릭터입니다. 드라마 속 콤비인 더피와 서씨(까치)가 조선시대의 대표적 민화 주제 중 하나인 ‘까치호랑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데요. 흘러간 과거였던 이 까치호랑이는 21세기의 디지털 매체로 다시 불려왔고, 전 세계를 아우르는 디지털 콘텐츠 공급망을 통해 순식간에 가장 ‘핫’한 글로벌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글로벌 팬덤의 관심은 더피에 대한 ‘덕질’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열기는 조선시대 민화 속 까치호랑이에게로 연결되어 국립중앙박물관의 까치호랑이 배지는 없어서 못 파는 최고 인기 기념품이 되었습니다. 더피 캐릭터에 영감을 준 조선시대 호작도(虎鵲圖)를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으로도 연일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글로벌 자본(넷플릭스와 소니 픽처스)이 판을 깔고,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창작자(한국계 미국인 감독 매기 강)가 보편성과 진정성을 결합한 작품을 만들고, 여기서 파생된 관심이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재창작으로 이어지는 이 현상은 디지털 시대의 문화가 마주하는 기회와 도전과제를 모두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피의 인기를 보면서 우리는 디지털 전환이 지역 문화를 순식간에 글로벌 문화로 탈바꿈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파생되는 수익이 저절로 모두에게, 특히 영감의 원천이 되는 문화에 고루 돌아가지는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케이팝과 까치호랑이는 여전히 우리의 문화이지만 ‘케데헌’과 ‘더피’의 IP(지적재산권), 그리고 몇 조 단위의 수익은 한국과 아무런 관계가 없죠. 물론 까치호랑이가 우리 것이니 더피에게서 로열티를 걷자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문화에 대한 접근성을 확대하고 문화 상품과 서비스의 가용성을 증대시키는 디지털 시대의 변화들이 모두에게 공평한 혜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앞으로 더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는 뜻이죠.
몬디아컬트에서도 회원국들은 디지털 기술 및 디지털 전환과 관련된 문화 이슈를 주요 의제로 다루었습니다. 그러면서 문화 부문에서의 고용을 위해 새로운 기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개발하고 디지털 플랫폼에 대한 공정한 접근성을 증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요.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해당사자 간의 열린 대화가 필수라는 데 공감을 표했습니다. 유네스코 역시 문화 분야에서 디지털 기술이 가져다 준 기회와 도전과제에 대해 지속적인 논의와 연구를 촉진해 왔습니다. 지난 2022년 발간한 글로벌 보고서 『문화정책의 (재)구성』에서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 디지털 격차, 디지털 산업에서의 분배 및 성평등, 데이터 주권과 창작자 권리 보호 등을 두루 살펴본 바 있습니다. 아울러 문화가 ‘글로벌 공공재’로서 자리잡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보완하고 해결할 수 있는 정책과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와 기후행동
노벨상에 빛나는 한강 작가의 문학 세계는 우리에게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모두가 과거에 빚을 지고 있고, 과거의 그들이 받은 고통과 기억이 오늘의 우리에게 미래를 향해 한발 내딛을 힘을 주고 있다는 것인데요. 그렇다면 과거에 두고 온 ‘이야기’들도 새로운 내일을 고민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미국의 한인 3세대 작가인 태 켈러(Tae Keller)에게 2021년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뉴베리상을 안겨준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은 이 물음에 대해 ‘그렇다’고 답해주는 작품입니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 소녀 릴리의 환상에 나타나 “할머니가 훔쳐간 이야기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호랑이는 특히나 그 사실을 더 잘 아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야기의 마법은 강력하지, 사람을 바꿀 수도 있을 만큼. 그리고 이야기를 가두어 놓으면 그 마법은 더욱 커져. 그리고 때로는 상해 버리기도 해. 마법이 일종의 독으로 변하는 거야.”
호랑이는 이야기가 그것을 듣는(읽는)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흐르고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호랑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우리 역시 전통 지식과 문화의 힘에 대해 좀 더 단단한 믿음을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 바로 유네스코가 그래왔던 것처럼요.
오늘날 세계 곳곳에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쌓여 온 문화적 지식들이 비과학적이라는, 혹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꼬리표를 달고 방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정말로 오늘의 우리에게 가치가 없는 철 지난 이야기일 뿐일까요? 유네스코는 이러한 시각이 늘 옳을 수 없으며, 원주민과 토착민들의 전통과 지식은 오늘날의 도전과제에 대한 우리의 대응 전략에 귀중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래된 지식과 이야기들은 지역 사회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역경 속에서도 문화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는데요. 사회가 그 오랜 세월 동안의 변화에도 적절히 대응하도록 도움을 주었던 힘이라면, 지속가능한 성장을 고민해야 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분명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몬디아컬트에 모인 회원국들도 이러한 유네스코의 주장에 힘을 실었습니다. 우리는 문화와 문화유산을 기후변화로부터 보호해야 할 방안을 전체적인 기후변화 논의에 통합시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더 다양한 지식과 문화를 기후 전략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요. 기후변화를 멈춰 세우기 위한 모두의 인식을 높이고 행동을 촉발시키는 데 문화적 표현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쌓아온 지식과 경험, 기억과 성찰을 담은 ‘과거의 이야기’들은 오늘날의 새로운 이야기에 끊임없이 영감을 줄 텐데요. 이를 바탕으로 창작자들이 만들고, 퍼뜨리고, 다시 변주하는 이야기들은 과학적 지식과 대중 참여 사이의 간극을 연결하는 새로운 관점과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읽은 우리들은 지금 당장 해야 할 행동에 더이상 주저하지 않게 되겠죠. 태 켈러의 작품 속 호랑이가 말했던 이야기의 강력한 마법은,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꾸기 시작할 겁니다.
+ 문화 정책은 우리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1982년, “문화는 단지 예술과 문학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의 삶의 방식”임을 선언하며 문화를 독립적 정책 영역으로 제도화하는 전환점이 되었던 몬디아컬트는 40주년이 되던 2022년 회의에서 문화가 ‘글로벌 공공재(Global Public Good)’임을 선언하면서 문화가 단순한 보호 대상이 아닌 인류 공동의 미래를 위한 자산이라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바르셀로나에 모인 회원국들은 문화가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달성의 조건이자, SDGs가 마무리되는 2030년 이후의 새로운 목표(post-2030)에 대한 논의에서 독립적인 목표로서 포함되어야 하는 주제라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오늘 뉴스레터에서 소개한 주제들을 포함해 이번 회의에서 회원국들이 다룬 8개 주제에는 우리의 더 나은 미래에 문화가 기여할 수 있는 바에 대한 믿음, 그 변화를 추동하고 뒷받침하는 정책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문화 정책은 정말 우리 미래를 바꾸는 힘이 될 수 있을까요? 그건 어떤 정책을 어떻게 시행하느냐에 달렸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K-콘텐츠들을 통해 세계 문화의 중심으로 다가가고 있는 우리나라에 그 주도적 역할을 기대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기후위기 대응, 전통지식과 첨단기술의 결합, 분쟁 이후의 평화·기억 정책, 문화권의 제도화 논의에서 한국의 독창적 경험은 분명 적지 않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몬디아컬트에서 다룬 의제들은 우리나라가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는 데도 정밀한 밑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전환 의제는 한국의 플랫폼 중심 산업구조 속에서 창작자 권리와 공정 보상을 보장하는 문제로 이어지고, 교육과 문화의 통합 의제는 다문화 사회의 도전에 대응하는 핵심 영역이 될 수 있으며, 창의성·평생학습·인권·평화·문화산업 등은 한국 교육 혁신 전반으로도 직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문화적 자산에 가치를 더하고, 나아가 전 세계가 공유하는 문화적 자산이 모두의 미래에 공평하게 기여할 수 있도록, 문화를 중심에 둔 한국과 유네스코의 행보에도 더 깊은 관심과 응원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김보람 <유네스코 뉴스레터>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