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디아컬트 2025 참석 한건수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인터뷰
여러분에게 ‘문화’란 무엇인가요?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아름다운 문장, 내 기분을 찰떡 같이 알아주는 멜로디와 노랫말, 일상의 기쁨이자 안식처가 되는 음식 등, 문화란 우리 삶의 모든 순간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따라서 ‘문화가 없는 삶’이란 더는 인간다운 삶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 대해 우리는 이미 공감대를 갖고 있는데요. 이러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유네스코를 비롯한 전 세계 문화 관계자들은 문화가 의식주 및 교육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기본적 권리이며, 따라서 앞으로 글로벌 차원의 주요 발전 논의에서도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지난 뉴스레터에서 소개한 몬디아컬트 2025 회의 역시 이러한 노력의 주요 이정표 중 하나인데요.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이번 회의에 참석한 한건수 교수(강원대 문화인류학)로부터 지금 논의되고 있는 문화 정책의 내용,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문화 목표 설정을 위한 데이터, 그리고 문화의 범주에 대한 더 넓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 지난 2022년 멕시코시티 회의에 이어 전 세계 문화 리더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멕시코시티가 ‘글로벌 공공재’로서의 문화의 의미를 천명하는 자리였다면, 이번 바르셀로나 회의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룬 것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번 회의에서는 몬디아컬트 2022 선언에서 강조한 6개의 주제(문화권, 문화와교육, 문화와 기후행동, 문화영역에서의 디지털 기술, 문화의 경제, 문화·유산·위기)와 2개의 핵심 영역(평화를 위한 문화, 인공지능과 문화)을 다루었습니다. 주제별로 지난 4년간 각국의 문화정책 실천 사례나 그 과정에서 제기된 새로운 문제를 토론했고, 문화정책 전반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어떻게 반영할지를 고민했습니다. 특히 디지털 전환을 경험하고 있는 국가들의 다양한 상황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넷플릭스와 아마존 같은 글로벌 플랫폼 회사들도 ‘스토리텔링’이나 ‘디지털 문화에서의 창작’ 같은 세션에 참가했다는 점도 눈에 띄었습니다. 그밖에 청년포럼을 비롯해 창의도시, 예술교육 등 시민사회가 제기하고 구성한 다양한 세션에도 많은 사람이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회의 기간에 많이 언급된 내용은 2030년 이후 새로운 발전 목표 설정에 있어서 문화를 독립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지속가능발전목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문화의 역할과 의미를 강조하면서, 이제는 문화를 독립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고 타당하다는 의견이 다양한 맥락에서 제기되었습니다.
+ 말씀하신 8개 의제들은 전 지구적 과제를 아우르고 있는데요. 한국적 맥락에서도 특히 더 의미가 있는 부분을 꼽자면 어떤 것들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사실 모든 의제가 한국사회에 적합한 정책 과제입니다.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의 위협을 고려하면 평화를 위한 교육이 절실하고, 문화와 기후행동, 문화유산의 보호 등 시급한 과제가 한둘이 아닙니다. 디지털 전환과 문화 의제를 연결하는 것은 한국사회가 선도적으로 추진할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전환의 속도가 빠르고, 정보통신기술 활용도가 높은 상황에서 디지털 전환이 가져올 문화권이나 문화다양성에 미칠 영향, 창작자의 권리 보호 방안 등 정책적 대응을 해야 할 과제를 진단하고 구체적 조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 교육을 기본권으로 자리잡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유네스코는 이번엔 ‘문화권’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대중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개념일 것 같습니다. 문화가 단순히 삶을 누리고 즐기는 방식이 아니라, 공공재이자 인간다운 삶의 중요한 전제 조건임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설득 방법이 유효할까요?
‘문화권’을 인권의 차원에서 보장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1948년 세계인권선언 채택 과정에서도 이미 제기된 바 있습니다. 이때 논의된 문화권 개념은 개인과 소수집단의 언어와 문화의 권리를 보장하는 구체적 제안을 담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원주민 문화를 억압했던 국가나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유럽 국가들의 반대로 “모든 사람은 공동체의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감상하거나 그 혜택을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세계인권선언의 27조 1항)라든지, “문학과 예술적 창작물에서 생기는 정신적, 물질적 이익을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27조 2항)라는 등의 매우 일반적이며 추상적인 표현으로 합의되는 데 머물렀습니다. 문화권의 주체가 개인인지 공동체인지 명시하지 못했고, 국가나 식민지배국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원주민과 피식민 주민, 소수 집단의 문화적 권리를 말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었죠.
하지만 몬디아컬트 2022(멕시코시티) 회의에서 문화를 글로벌 공공재로 선언하면서 문화권 논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가 공공재라는 말은 곧 ‘모든 사람이 문화적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선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몬디아컬트 2025(바르셀로나) 회의에서는 이러한 문화권에 대한 논의를 구체적으로 토론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변화하는 국제질서와 과학기술의 발전 맥락에서, 문화적 권리의 내용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실천 방안을 논의했죠. 문화가 인간다운 삶의 중요한 조건임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하기 위한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토론과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문화권을 인권의 보편성 개념과 연계해 보장하려면 문화의 보편성과 상대성에 관한 토론과 내용적 합의도 함께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인 이해와 합의의 폭을 넓히기 위한 대화와 토론이 선행될 때, 문화권의 개념도 전 세계에서 더 설득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 한류와 K-콘텐츠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문화 자산은 이제 세계의 중심에 들어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성과를 문화 정책 분야에서도 선도하고 이어가기 위해 앞으로 집중해야 할 부분은 무엇이라 보시는지요?
먼저, 한류의 확산과 성장을 경제적 관점에서만 바라보거나 지나친 문화적 우월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실 ‘K-콘텐츠’라는 용어의 남용도 우려가 됩니다. 자칫 배타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용어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증진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합의와 규범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문화강국이라면 어설픈 민족주의(국민국가주의)에 도취될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문화 의제를 이해하고 선도하며 포용하는 지도력을 가져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문화정책은 ‘문화산업 정책’을 넘어서야 합니다. 이번 몬디아컬트 2025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이 바로 이에 해당합니다. 모든 인류의 공공재인 문화가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자원이자 동력임을 인정하고, 문화의 영역에서 국제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함께 풀 수 있는 정책을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 유엔의 post-2030 논의에서 문화를 독립적인 발전 목표로 포함시키는 것은 앞으로 몇 년간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한 문화 분야의 중요한 화두일 것 같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필요조건, 혹은 그 가능성에 대해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문화를 독립된 발전 목표로 설정하자는 논의는 2029년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릴 몬디아컬트 2029 회의에서 더욱 구체화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감대는 이미 형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문화를 독립된 분야로 설정하는 데 중요한 쟁점은 세부 목표로 명시될 구체적 항목과 지표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를 위한 활발한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문화 분야의 통계가 중요합니다. 이번 회의의 부대행사 중에도 문화 분야의 통계 수립에 대한 세션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아직까지 기초자치단체 단계에서는 문화산업이나 문화 분야의 통계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는데요. 국제사회가 함께 노력해 충분한 자료를 확보해야만 증거 기반의 문화정책과 문화분야의 세부 달성 목표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지난 문화다양성협약 채택 과정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가지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면, 앞으로의 논의에서 문화의 개념이 너무 좁게 설정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문화적 표현’이라는 범주로 문화다양성의 개념이 협소해졌던 사례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1982년 몬디아컬트 회의에서 우리는 문화를 ‘예술과 문학에 한정되지 않고 인간의 생활양식과 기본적인 권리들을 포함하여, 한 사회나 사회집단을 설명해 주는 독특한 정신적, 물질적, 지적, 정서적 특질들의 복합적 전체’로 이해해야 한다고 선언한 바 있는데요. 문화의 이러한 폭넓은 정의에 바탕을 두고 문화권에 대한 논의, 그리고 문화를 독립된 글로벌 발전 목표로서 설정하는 논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앞으로 문화가 독립 분야로 설정되면, 해당 세부 목표의 내용과 범위를 바탕으로 각국의 주류 문화정책의 방향도 설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네스코 뉴스레터> 편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