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한가운데에는 파리 안의 작은 섬이라고 할 수 있는 시테 섬(île de la Cit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파리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인 만큼 이 섬은 항상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인데요. 모두의 시선이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향하는 가운데, 대성당 뒤편의 섬 동쪽 구석에는 사람들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장소가 하나 있습니다. ‘유배순교자 기념물(Mémorial des martyrs de la Déportation)’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오늘은 2차대전 당시의 잔혹한 폭력의 역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그곳에서 주재관이 보내온 메시지를 여러분께 전합니다.
센강 남쪽과 시테 섬을 잇는 대주교의 다리(Pont de l’Archevêché)를 건너자마자 왼쪽에 보이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뒤로하고 섬 동쪽 끝으로 가면 유배순교자 기념물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이 기념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강제수용소로 추방된 약 20만 명의 프랑스 및 점령지 거주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추모관입니다. 건물 자체는 석조 벙커를 연상시키는 모습이고, 입구로 내려가는 좁고 가파른 계단은 방문자들에게 불편함과 긴장감을 주어 기념물의 엄숙한 추모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수용소 같기도 하고, 동굴 같기도 한 기념물 내부에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 영상을 시청하는 방을 비롯해 희생자를 상징하는 20만 개의 작은 조명으로 구성된 설치물, 각종 사진과 글귀가 전시된 공간이 이어집니다. 벽면 틈새 너머로는 센강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도 하는데, 벽 너머로 겨우 눈에 들어오는 센강은 오히려 이질감과 함께 외부로부터의 고립감을 더하기도 합니다.
이 기념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당시 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실제로 작성한 글과 그림들로 꾸며진 벽이었습니다. “돌보기(SOIGNER)”,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기(ÉCRIRE MALGRÉ TOUT)”, “예술을 통해 저항하기(RÉSISTER GRÂCE À L’ART)”, “계속해서 믿기(CONTINUER DE CROIRE)”… 정말 소박하고도 일상적인 말들이지만, 이것이야말로 매일같이 죽음과 절망에 직면했던 강제추방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일이었을 겁니다. 이러한 것들을 상기시키면서 유배순교자 기념물은 자칫 잊히거나 왜곡될 위험마저 있는 인류의 아픈 역사를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유배순교자 기념물과 같이 오늘날 세계 곳곳에는 ‘홀로코스트’ 혹은 ‘제노사이드’와 같은 비극을 기억하고 있는 장소가 많이 있습니다. 관련된 행사나 기념일도 결코 적지는 않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일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집단잔혹범죄(atrocity crimes)를 교육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잔혹한 폭력은 그 자체로 민감하고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홀로코스트와 제노사이드에 대한 언급을 꺼리거나 덮어두어야 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서 유네스코는 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 및 폭력적 과거에 대한 교육을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지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고 연구해 왔습니다.
집단잔혹범죄와 관련해 유네스코가 추진하는 교육활동은 주로 홀로코스트,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 1994년 르완다 대학살 등을 다루고 있는데요. 각 범죄들이 발생한 원인과 그 영향을 탐구하면서 재발을 막기 위한 방법도 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회원국의 관련 교과서와 교육과정의 개정을 지원하기 위한 지침과 도구를 제공하고, 교육정책을 개발하고 수정하며, 박물관이나 기념관 등을 적극 활용하면서 비정규 교육과 정규 교육 간 연계협력을 강화하는 등의 활동을 포함합니다. 또한 유네스코의 고등교육 협력 프로그램 중 하나인 ‘석좌(UNESCO Chairs)’ 제도를 활용하여 극단적 폭력 예방에 관한 연구와 교육 활동 역시 꾸준히 펼치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교육 활동 외에도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1월 27일)’, ‘르완다 투치에 대한 제노사이드 국제 반성의 날(4월 7일)’ 등의 기념일을 통해 인류의 아픈 기억이 끊임없이 국제적 차원에서 기억되고 반추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유네스코는 이러한 일에 집중하는 것일까요? 그 단서는 유네스코 헌장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헌장 서문은 “정부의 정치적·경제적 조정에만 기초를 둔 평화는 세계 국민들의 일치되고 영속적이며 성실한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는 평화가 아니다. 따라서 평화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인류의 지적·도덕적 연대 위에 평화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국가 간 정치·경제적 협력만으로 평화가 달성될 수 있었다면 애초에 홀로코스트나 제노사이드와 같은 집단잔혹범죄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제노사이드와 같은 집단잔혹범죄는 ‘국가 사이’에서 발생하지 않고 ‘국가 안’에서 발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지적·도덕적 연대를 기반으로 한 평화의 건설은 다소 이상적인 목표로 느껴질 수는 있지만, 그만큼 국가 간 협력의 한계를 메울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파리의 유배순교자 기념물에서 보았던 “돌보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기”, “예술을 통해 저항하기”, “계속해서 믿기”라는 문구 하나 하나가 뇌리에 오래 남아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 모든 것들이 유네스코의 방향성과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너무 이상주의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믿고 노력하는 것”은, 어쩌면 그 어떤 절망적 상황 앞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자, 아픈 역사의 재발을 방지하는 데 가장 유효한 태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절망이나 폭력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언젠가 파리를 방문하게 된다면 “여러 일정에도 불구하고” 노트르담 대성당 뒤편의 유배순교자 기념물에 들러, 역사를 대하는 세계시민으로서의 책임감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제안합니다.
백영연 주유네스코대한민국대표부 주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