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다보스 포럼에서 한 미래학자는 15년 내에 인류가 맞이할 네 가지 주요 현상을 꼽았다. 석유 가격이 500달러가 되는 것, 물이 석유처럼 교환 상품이 되는 것, 아프리카가 강력한 경제 세력으로 부상한다는 것, 그리고 책의 소멸이다. 네 번째 예측은 종이 책이 없어지고, 파일로 된 전자책이 대세라는 말이었다.
원시인들이 벽에 새긴 그림, 파피루스에 쓴 글, 그리고 현재의 종이책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무엇인가 전하고자 했고, 또 그 전하는 바를 읽고자 했다. 따라서 ‘책’은 어떤 매체를 뜻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읽는 행위’를 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책은 인류가 축적해 온 지식을 담고 있고, 책을 통해 인류의 망각과 소멸의 위협을 지키며, 책을 통해 인류는 진보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책의 역사의 맞은 편에는 책을 불태우는 역사가 있다. 책을 읽지 않고, 기억을 지우는 작업은 책을 불태우는 역사의 현대적 모습일 것이다.
『책의 우주』는 세계적인 작가 움베르토 에코와 프랑스 시나리오 작가 장클로드 카리에르의 대담을 출판사 편집자 장필리프 드 토낙이 정리한 책이다. 책에 관해 모든 것을 아는 듯한 두 사람은 책과 책이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TV와 영화로 대표되는 영상의 출현으로 이미지의 시대로 회귀할 것 같았던 세상이 인터넷의 출현으로 다시 문자의 시대로 회귀했다는 이야기는 신선했다. 읽고 쓸 수 없으면 컴퓨터를 할 수 없다고, 인터넷으로 통제할 수 없는 기억이 우리 수중에 들어오게 된 상황에서, 책은 하나의 매체이지만,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관찰하고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어쩌면 모든 것을 결정할 수도 있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대단한 장서가, 애서가, 저술가인 그들의 마지막 한 마디는 “책은 죽지 않는다!”이다. “우리가 읽기만 한다면”을 덧붙여야겠지만.
에코는 어쩌면 사라진 책들이 ‘지혜의 정수’였는지도 모른다는 대답과 함께 오늘날 남아있는 책들이 ‘인류 지혜의 정수’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진다. 문명의 역사에서 선택과 여과의 과정을 거치고 전해진 책들. 오직 그것만이 남아 있을 뿐이고, 그런 면에서 우리가 책을 읽음으로써 무지와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은 단지 희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오류와 무지를 배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에코는 말한다. “인간은 굉장한 존재입니다. 불을 발견했고, 도시들을 세웠고, 눈부신 시들을 썼고, 세계를 해석해 냈으며, 신화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의 동류(同類)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오류를 범했고, 또 자신의 환경을 파괴해 왔습니다.
이 드높은 지적 미덕과 하천한 짓거리를 서로 견주어보면 거의 비등비등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인류가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축적해 온 지식과 몽상을 담고 있는 책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지혜와 오류가 충돌해 다시금 새로운 무엇을 낳게 하는 데 그 존재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읽는 행위’가 반복될 때마다 책은 변화하고 인간도 변한다. 인류의 문명은 책이 끊임없이 인간을 추동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책의 역사로 가득 채워져 있는 과거, 책을 통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었던 현재, 그리고 책이라는 것을 통해야 도달할 미래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의 대화는 다시금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또 그 책을 읽는다.
노지원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홍보소통실
책속으로 “지난 5백 년 동안 책이라는 물건의 형태에는 이런저런 변화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기능과 구성 체계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책은 수저나 망치나 바퀴, 또는 가위 같은 것입니다. 일단 한번 발명되고 나면 더 나은 것을 발명할 수 없는 그런 물건들 말이에요. 수저보다 더 나은 수저는 발명할 수 없습니다. (…) 책은 자신의 효율성을 이미 증명했고, 같은 용도의 물건으로서 책보다 나은 것을 만들어 내기는 힘듭니다. 어쩌면 책을 이루는 각각의 구성 요소들이 변할 수는 있을 거예요. 예를 들어 책장이 더 이상 종이로 만들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책은 지금의 그것으로 남아 있게 될 겁니다.”(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