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적한 공기와 멋진 햇살이 늘 함께하는 5월, 여러분은 어떻게 즐기고 계신가요? 이 아름다운 계절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려 서울의 성수동 같은 카페 골목을 둘러보노라면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을 거예요. 바로 콘크리트의 거친 질감을 그대로 드러낸 건물들이 정말 많다는 사실이죠. 십여 년 전부터 ‘인스타 감성’ 넘치는 카페의 공식처럼 자리잡은 이러한 인테리어 기법은 20세기 중반의 건축사조 ‘브루탈리즘(Brutalism)’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이름의 어원이 되기도 한 ‘노출 콘크리트(béton brut)’ 기법으로 대표되는 브루탈리즘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2월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에도 잘 드러나 있는데요. 이 영화가 세계 주요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면서 영화팬들뿐 아니라 건축과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브루탈리즘에 담긴 이상과 그러한 건축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 유네스코 패밀리들이 귀를 쫑긋 세울만한 이야기는 바로 이 영화에 영감을 준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 건물도 디자인했다는 사실! 그래서 오늘은 브루탈리즘을 중심으로 건축과 영화, 그리고 유네스코의 이상을 아우르는 이야기를 준비해 보았어요. 건축과 인테리어에 담긴, 단순한 ‘기능’을 넘어서는 깊은 고뇌를 알고 나면 거리의 카페도, 파리 본부 건물에 담긴 유네스코의 이상도, 한층 더 새롭게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작년 9월 제81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브레이디 코베이(Brady Corbet) 감독의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해당 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을, 2025년 제8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을, 제97회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전 세계 영화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영화는 1947년부터 1970년까지 미국 펜실베니아를 배경으로 유대인 건축가 라슬로 토트(László Tóth)의 삶을 따라가는데요. 명배우 애드리언 브로디(Adrian Brody)가 연기한 주인공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그의 성격과 건축 철학은 실존 인물인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1902-1981)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브로이어는 바우하우스 출신의 천재 디자이너이자 건축가로, 유럽의 파시즘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헝가리 출신 난민이었습니다. 그는 이민자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았고, 국경을 넘어선 연대와 협력의 가치를 믿었으며, 국제주의 건축의 최전선에 섰던 인물입니다. 비록 그의 이름이 종종 ‘브루탈리즘’과 함께 언급되지만 브로이어 자신이 이 용어를 직접 사용한 적은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의 많은 작품이 브루탈리즘의 특징 중 하나인 노출 콘크리트(béton brut)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구조적 요소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미학적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브로이어는 브루탈리즘과 관련된 주요 건축가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영화 속에서 라슬로 토트가 그러했듯, 브로이어에게 건축이란 단순히 ‘건물의 모양’을 어떻게 만드는가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건축이란 단순히 공간을 형성하는 것을 넘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사유와 관계를 아우르는 ‘이상’에 관한 것이었죠. 그저 비바람을 막아주는 쉼터만이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의 꿈과 생각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거기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것이 건축을 바라보는 브로이어의 관점이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브로이어가 남긴 가장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는 바로 파리 중심부에 자리한 유네스코 본부 건물입니다. 의외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58년에 완공된 이 건물에도 사무 공간이라는 단순한 기능적 요소만이 아니라 문화와 교육, 평화에 대한 유네스코의 이상이 담겨 있습니다.
+ 유네스코 본부: 이상을 건축한 세 명의 손길
유네스코 본부는 브로이어를 포함한 세 명의 세계적 건축가가 협업해 설계했습니다. 1953년 국제 공모를 통해 본부 건물 설계팀으로 선정된 세 명은 프랑스 근대화를 상징하는 그랜드 프로젝트의 주역 버나드 제르퓌스(Bernard Zehrfuss), 이탈리아 구조공학의 대가이자 현대 콘크리트 구조물 설계의 선구자였던 피에르 루이지 네르비(Pier Luigi Nervi), 그리고 건물 전체의 디자인과 공간 흐름을 조율한 브로이어였습니다. 언어도, 건축 철학도 서로 다른 이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바로 유네스코가 구현하고자 하는 이상(理想)이었습니다. 유네스코는 새로운 보금자리가 단지 행정 공간이 아니라 냉전의 균열 속에서 인류가 아직 대화할 수 있다는 신념, 문화와 과학과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공존을 모색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담은 상징적 건축이길 원했습니다. 세 명의 건축가들에게도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협업을 넘어 미래에 대한 인류 공동의 비전을 건물에 투영하는 일이었고, 그래서 창 하나, 벽 하나를 세우는 일에도 신중한 논의와 조율을 거쳤습니다.
유네스코 본부 건물은 전형적인 직사각형이 아닌 ‘Y’자형 삼각형 평면 구조를 채택했는데, 이는 브로이어의 아이디어에 기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단지 미적인 실험이 아니라 세 개의 주요 동(윙)을 효율적으로 연결하면서도 자연광과 환기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회의실과 사무실, 전시 공간 등이 각 동에 기능별로 배치되었고, 중심부는 넓은 중정과 열린 통로로 구성함으로써 방문자와 직원이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는 구조를 갖췄습니다. 건물 일부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필로티(pilotis, 기둥 위 건축)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는 당시 르 코르뷔지에식 근대 건축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브로이어 특유의 조형적 감각이 더해진 결과라고 합니다.
+ 건축과 예술의 공존 위에서 던지는 질문
유네스코는 ‘일하는 공간’이 아닌 ‘세계 문화를 상징하는 광장’이라는 비전을 본부 건물에 담고자 했습니다. 이에 따라 유네스코 회원국들이 본부에 자국의 대표 예술가들의 작품을 기증하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파블로 피카소의 대형 벽화 ‘이카루스의 추락(Fall of Icarus)’, 알렉산더 칼더의 ‘나선(Spirale)’,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Walking Man)’, 후안 미로의 ‘달의 벽(The Wall of the Moon)’, 안도 타다오의 ‘명상의 공간(Meditation Space)’ 등 웬만한 유명 미술관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거장들의 작품을 건물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작품이 단순히 공간을 꾸미기 위한 ‘전시’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작품은 건축 구조 속에 통합되어 있어, 복도와 계단, 광장, 회의실 곳곳에서 건축의 연장선처럼 기능하며 본부 건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미술관이자 문화 교류의 장으로 만듭니다. 브로이어와 네르비는 건축과 예술이 충돌하지 않도록 각 공간의 리듬을 조율했고, 제르퓌스는 파리 도시 맥락 속에서 이 건물이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전체의 스케일과 배치를 조정했습니다.
1958년 완공된 유네스코 본부는 6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네스코 총회와 집행이사회, 전문가 회의들이 열리는 국제 무대로 제 역할을 하면서, 전 세계에서 온 수천 명의 직원과 방문객을 아우르는 지구촌 협력의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건물은 그저 콘크리트와 유리로 만든 구조물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협력할 때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며, 건축이 이념과 가치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2차대전의 고통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고자 만들어진 유네스코의 보금자리로서 이 건축물은 평화를 향한 건축가들의 신념과 실천이 응축된 공간입니다. 그리고 20세기에 마르셀 브로이어와 그의 동료들이 이상적 미래를 꿈꾸며 만든 공간은 67년의 세월을 넘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어떤 공간에서, 그리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전진성 한국유네스코연구소장
알쓸U잡 더보기 🧐 | 유네스코 본부에 있는 우리나라 예술작품은?
유네스코 본부가 전 세계에서 기증받아 소장하고 있는 작품의 수는 무려 700여 점에 달한다고 해요. 이들 중에는 우리나라 예술가들의 작품도 여러 점 소장돼 있어요. 강익중 작가의 ‘청춘(Power of Youth)’, 민경갑 화백의 추상화 ‘자연 속으로(Towards Nature)’ 등과 고려청자도 있답니다. 그중에서 강익중 작가의 설치작품 ‘청춘’은 유네스코 정보커뮤니케이션 분야 사무실들이 있는 5층 메인홀에 전시돼 있는데요. 이 작품이 우보 민태원 선생의 산문 ‘청춘예찬’의 일부를 한글과 달항아리를 활용해 표현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공간과 전시품이 하나로 연결되는’ 유네스코의 공간 설계 철학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어요. 이러한 다양한 의미와 예술적 성취를 담은 작품들과 유네스코 내부 공간을 보고 싶어하는 일반인을 위해 유네스코 본부는 가이드 투어도 운영하고 있으니, 혹시 파리에 들릴 계획이 있는 유네스코 패밀리 여러분이라면 꼭 메모해 두세요!
→ 주재관이 쓴 유네스코 본부 예술작품 탐방기(2022년 5월) 읽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