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문화유산의 날 맞은 파리
9월 17-18일, 프랑스에는 ‘유럽 문화유산의 날’(Journées européennes du patrimoine)이라는 아주 특별한 문화 축제가 열렸습니다. 매년 9월 셋째 주 주말, 프랑스 전역의 박물관과 미술관, 성당, 고성은 물론 평상시 출입이 제한된 대통령궁, 의회 등의 공공기관을 대중에게 개방하는 행사입니다. 지난 6월호 주재관 서신을 통해 전해드렸던 ‘박물관의 밤’에 이어, ‘유럽 문화유산의 날’을 맞아 평소 궁금했던 파리의 또 다른 모습을 만나 보았습니다.
올해로 39회째를 맞은 ‘유럽 문화유산의 날’은 1984년 프랑스 문화부를 중심으로 시작한 이래, 많은 유럽 국가들이 동참하며 유럽 전역의 행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나라마다 규모와 색채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역사 유적지와 문화유산은 물론 평소에 공개하지 않는 관공서들을 대중에게 개방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올해 행사의 주제는 ‘지속가능한 문화유산’인 만큼 유네스코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매년 가장 인기가 많은 방문지는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 궁으로, 몇 시간에 이르는 대기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총리 관저인 오뗄 드 마띠뇽, 상원 의사당인 뤽상부르그 궁도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라디오 프랑스 등의 방송국과 중앙은행, 시청, 소르본 대학 등 평소에 갈 수 없는 곳을 찾아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들을 수 있다는 점도 일반인들에게 굉장한 매력입니다.
제가 이번에 찾은 곳은 유네스코 본부의 바로 이웃에 자리한 에콜 밀리테르(École militaire)와 유네스코 본부입니다. 에콜 밀리테르는 1751년 루이 15세가 세운 왕립 사관학교로 나폴레옹이 생도 시절을 보낸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평소 유네스코 건물 7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의 통유리 너머로 가만히 내려다보면 굳게 잠긴 정문 뒤의 드넓은 부지에서 기마훈련을 하는 듯한 모습이 보여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에콜 밀리테르도 이번 ‘유럽 문화유산의 날’ 대중들을 맞이하여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방문객들은 실제 승마 시범 행사를 관람하고, 개방된 마구간에서 훈련용 말들을 직접 쓰다듬어 볼 수도 있었습니다. 퀴즈 행사와 왕립 군인들의 군복을 입어보는 착장 행사도 열렸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 단위 관람객을 위해 간이 놀이시설 역시 잘 갖춰 놓았습니다. 구경을 하다가 배가 고파지면 카페테리아에서 음식을 받아 정원에 나가 먹어보기도 합니다. 에콜 밀리테르 고위급 수장의 집무실이라든가 파티가 열리는 방 역시 하나하나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교내에 자리하고 있는 아름다운 생 루이 성당의 콘서트에서 울려 퍼지는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선율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에콜 밀리테르라는 공간이 더는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에콜 밀리테르를 나와 다시 유네스코로 자리를 옮겨봅니다. 국제공무원과 외교관으로 가득했던 유네스코 본부도 흥미진진한 눈빛의 일반인 관람객들로 가득 찼습니다. 방문객들은 유네스코 본부의 자랑인 피카소, 미로, 자코메티, 칼더 등 거장의 작품을 눈앞에서 관람하며, 일종의 박물관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 유네스코 본부를 한껏 즐겨봅니다. 주요 국제회의가 열리는 1번 회의장에서는 너도나도 기념촬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2번 회의장에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주제로 열린 포럼에 참석한 관객들의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특히 올해는 세계유산협약 50주년을 맞는 해로, 유네스코의 전문가들은 위기에 처한 세계자연유산과 지속가능한 관광, 전쟁 지역 또는 재해 발생 후 유산 보호를 포함한 현재 세계유산의 여러 도전과제에 대해 대중과 교류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유네스코의 주요 전시가 열리는 세귀르 홀(Hall Segur)에서는 지난 50년의 세계유산을 보여주는 현대 미술가 사샤 자프리(Sacha Jafri)의 전시가 열렸고, 유네스코 시네마에서는 세계유산에 대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유네스코의 경이’를 상영했습니다. 한편, 엘리베이터 홀에 긴긴 줄이 늘어서 있어 무슨 일인지 물어봤더니, 유네스코 사무총장 집무실을 관람하기 위한 대기줄이라고 합니다. 30분쯤 기다렸을까, 드디어 순서가 돌아오고 6층으로 올라가 관계자의 설명에 따라 오드레 아줄레 사무총장 집무실을 관람하면서 대중들은 국제기구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집니다.
이번 방문은 낯선 공간이었던 에콜 밀리테르는 한층 가깝게, 익숙한 공간이었던 유네스코는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해 줬다는 점에서 제게 무척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문화를 자유롭게 향유하고 호흡할 수 있는 이런 경험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유산 보존의 의미를 자연스레 체화하고 깊이 의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유럽 문화유산의 날에, ‘지속가능한 문화유산’을 위한 프랑스와 유럽 전역의 노력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임시연
주유네스코대한민국대표부 주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