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저희 통역사들은 오늘 근무하기로 예정된 시간이 15분 초과되어 이만 떠납니다. 모두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통역기를 통해 전해오는 안내가 한동안 믿기지 않았습니다. 2024년 11월 22일 금요일 저녁 6시 45분, 6개 언어 통역사들은 이처럼 짧은 인사말과 함께 제34차 IPDC(국제커뮤니케이션개발사업 정부간위원회) 집행이사회 참가자들을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통역 중단으로 회의가 멈추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주로 소규모 작업단 회의나 전문가 회의 등에서나 일어났던 일이었습니다. 이번처럼 정부간 회의는 보통 기한 내에 안건을 처리하기 위해 정부 대표들이 모인 만큼, 회의가 길어질 경우에는 사전에 통역사들과 협의하고 때로는 자정까지도 회의를 지속하곤 합니다. 그동안 밤늦게까지 연장된 여러 회의에 참가했지만 통역 문제로 회의가 중단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심지어 회의가 중단된 시점은 안건 결정문의 4분의 3정도를 논의한 상태에서 참가자들이 열띤 토론을 하던 와중이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크게 당황했습니다. 이미 오전에 회의가 밤까지 연장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고(슬픈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 걸까요), 당연히 유네스코 사무국이 통역사들과 협의를 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부 사정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문득 회의 중에 한 참가자가 ‘통역사가 내 말을 잘못 통역해서 내 의견을 오해했는지 모르겠다’는 발언을 농담조로 했던 게 떠올랐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동시통역사는 국제회의를 원만하게 진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회의 내내 고도의 언어능력과 집중력을 유지해야 하는 직업이기에 참가자들도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게 국제회의의 기본 에티켓이기도 합니다. 국제회의 참가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회의가 끝날 무렵에 참가자가 동시통역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거나 박수를 보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심지어 며칠간 이어지는 국제회의에서 통역사 한두 명의 목소리를 매일 듣다 보면 특별한 친밀감을 갖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저만의 내적친밀감을 갖고 있는, 그렇지만 이름도 알지 못하는 유네스코 동시통역사들이 있습니다.
통역사에게 자잘한 불만을 품게 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비록 그런 일은 매우 드물지만 통역사도 인간인 만큼 실수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특히 국제회의에서 중요한 내용이 잘못 통역되는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고위급 정부 대표의 실무자들이 자신들의 대표가 발언할 때 통역기를 끼고 동시통역을 확인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통역 실수만큼 큰 문제는 아니지만, 통역사의 목소리 톤이나 크기가 좀 아쉽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목소리가 매우 멋지다고 생각하는 유네스코 통역사 한 분이 계신데요. 그분의 ‘꿀보이스’는 너무나 부드러운 나머지 (특히 오후시간대에는) 저도 모르게 졸음이 올 정도라 썩 반갑지는 않습니다. 동시통역은 보통 2인 1조로 진행되는데, 두 통역사의 목소리 크기 차이가 너무 커서 계속해서 통역기의 볼륨을 조절해야 할 때도 난감합니다.
물론 통역사들 역시 이런저런 불만이 없진 않을 겁니다. 유네스코의 통역사들은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단호하게, 그런 내용을 솔직하게 알려주십니다. 대부분 발표자가 말을 너무 빨리하거나 목소리가 작을 때 나오는 지적인데요. 한번은 “지금 말씀하시는 분이 너무 빨리 얘기하셔서 통역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차갑게 얘기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번 정부간 회의에서도 통역사들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한 회의 참가자들이 못마땅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나저나 통역사들의 갑작스런 ‘퇴근’ 뒤 회의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 자리에 있던 36개 이사국 및 옵서버 회원국 대표들은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는데요. 스웨덴 대표가 나서 동시통역서비스가 제공되는 6개 유엔 공식언어(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스페인어, 아랍어, 러시아어) 대신 유네스코의 상용언어인 영어와 프랑스어로 회의를 진행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사실 유네스코대표부에 근무하는 외교관들 중에는 영어와 프랑스어 모두 유창하거나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스웨덴 대표의 제안에 바로 몇몇 회원국들이 찬성했고, 2년 만에 개최된 정부간회의를 제때 마치고 싶은 참가자들에게 희망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일부 국가들의 반대의견이 나왔습니다. 어떤 대표는 영어로만, 다른 대표는 프랑스어로만 회의에 참가할 수 있다고 밝혔고, 이대로 회의를 지속할 수가 없다는 게 점점 확실해졌습니다.
회의 중단을 바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규정에 따라 정회(suspension)는 투표를 거쳐 참가 회원국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만 가능합니다. 다행히(?) 압도적인 찬성표가 나왔지만, 이번에는 추가 회의 일정을 잡는 문제가 또 만만치 않았습니다. 추가 회의를 개최할 예산을 확인해야 하고(회의 예산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통역비입니다), 회의장 예약도 필수입니다(주말의 맛집만큼은 아니라도, 늘 국제회의가 열리는 유네스코 본부의 회의장 예약도 정말 치열합니다). 결국 다음 회의 일정은 바로 잡지 못한 채 사무국이 추후 결정하고 안내를 하기로 했습니다.
금요일 저녁 7시. 예상보다 일찍 퇴근하는 길이었음에도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겁고 하늘은 어두웠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을 주제로 하는 회의에서 참가자들이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없게 돼서 회의를 마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통역 관련 AI기술이 이미 곳곳에서 활용되는 상황을 고려하면, 국제회의 동시통역을 AI가 맡게 될 날도 언젠가 올지도 모릅니다. 통역사 퇴근 시간을 고민할 필요도 없으니 물론 편리한 점도 있겠죠. 하지만 정말 좋은 점만 있을까요? 정말 실제로 그런 날이 온다면, 저는 이번 회의를 떠올리며 한편으론 개성 넘치는 유네스코 동시통역사들을 그리워할 것 같기도 합니다.
주유네스코대한민국대표부 홍보강 주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