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금’이라는 말을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입이 하나, 귀가 둘인 이유는 말하기보다 듣는 것을 더 잘 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반드시 입 밖으로 나와야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직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는 내부 고발자의 용기, 이 세상의 부조리와 숨겨진 악행을 알리고자 하는 참된 언론인들의 끈기, 권력자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역사의 진실을 간직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는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단단한 벽에 부딪혀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히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가 널리 퍼지는 걸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으로 쌓아올린 성 위에서 세상을 굽어보려는 자들, 끝내 고이고 썩어버린 진실을 뒤덮은 악취로부터 이익을 얻는 자들, 한줌의 진실을 휩쓸어버린 거짓의 산사태가 이 세상의 진짜 모습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자들. 그런 사람들에게 맞서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이에게 ‘단단한 마음’만은 충분한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서지지 않는 마음과 용기는 언제나 귀하고, 그것을 막고자 하는 거짓과 기만과 겁박과 회유는 생각보다 더 흔하고, 강하고, 끈질기기 때문입니다.
1986년 12월 17일 저녁,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사상 최악의 마약 카르텔 두목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보낸 암살자들이 유력 신문 『엘에스펙타도르(El Espectador)』의 노련한 기자 기예르모 카노(Guillermo Cano)에게 총을 난사했습니다. “마약이 우리를 타락시켰고, 권력을 사고 파는 일이 우리를 타락시켰고, 손쉬운 돈벌이를 향한 갈망이 우리를 타락시켰다”면서 콜롬비아 정·재계를 장악한 마약 카르텔의 실태를 폭로해 오던 그는 차돌보다 단단한 마음과 굴하지 않는 용기를 가졌지만, 그것들도 카노의 목숨을 끝까지 지켜줄 수는 없었습니다. 카르텔은 3년 뒤인 1989년 9월 2일에 신문사 건물마저 폭탄으로 날려버렸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에스펙타도르』는 카노가 피살된 다음날, 그리고 신문사가 폭파된 다음날에도 신문 발행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진실을 향한 그들의 용기만은 부서지지 않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두 날짜 신문의 1면에는 단 한 글자도 다르지 않은 똑같은 제목이 실렸는데요. 그것은 “Seguimos adelante!”, 즉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였습니다.
+ 멈추지 않는 그들 뒤에 우리가 있습니다
기예르모 카노가 살해된 지 10여 년이 지난 1997년, 유네스코는 콜롬비아의 기예르모 카노 재단을 비롯해 세계 여러 단체들의 지원을 받아 유엔기구에서 제정한 상 중 유일하게 언론인을 대상으로 하는 ‘유네스코-기예르모 카노 세계 언론자유상’을 만들었습니다. 이 상은 언론 자유와 진실을 향한 언론인들의 용기를 기리는 동시에, 전 세계가 그들과 연대함으로써 그들의 단단한 마음과 용기가 홀로 외로운 싸움을 벌이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모두의 다짐을 재확인하는 상이기도 합니다.
세계 언론 자유의 날(5월 3일)을 하루 앞둔 지난 5월 2일, 유네스코가 발표한 올해 수상자는 특정 언론인이 아니라 ‘가자지구를 취재하는 팔레스타인 기자들’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자지구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땅 곳곳에서는 전 세계의 우려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증오와 파괴의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는데요. 이 세상의 상식과 규범이 닿지 않는 그곳에서 ‘절대 멈추지 않고’ 진실과 희망을 좇는 그들 모두에게 유네스코는 다시 한번 깊은 경의와 지지를 표했습니다. 수상자를 선정한 국제심사위원회를 이끈 마우리치오 웨이벨(Mauricio Weibel) 위원장은 “우리는 인류 전체로서 그들의 용기와 헌신에 큰 빚을 졌다”면서 “빛도 희망도 없는 시기에, 그들에게 우리의 지지와 연대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선정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언론인을 시상하고 지원하는 일 외에도 유네스코는 전 세계에서 취재 활동 중 살해당한 언론인 수의 추이와 발생 원인, 이후 처리 과정 등을 집계하는 피살언론인 관측소(Observatory of Killed Journalists)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공개한 데이터에 따르면 1993년 이후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살해된 언론인은 1,682명에 달합니다. 그런데 사망자들 중에서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 기자들’처럼 총알이 빗발치는 분쟁지역을 취재하던 언론인은 전체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절반(49.3%) 가량은 기예르모 카노 기자의 사례처럼 분쟁지역이 아닌 곳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취재 환경 자체의 위험성만이 아니라 취재 결과물이 세상에 알려지길 두려워하는 자들의 위협이 많은 언론인들을 노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깜깜하게 덮인 어둠에 빛을 비추고자 하는 사람들이, 전장 한가운데로 뛰어들 때나 가질 법한 불안을 집과 직장과 거리에서 마주할 일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 새로운 전선 위의 언론, 그리고 우리
역사적으로 진실에 빛을 비추려는 자와 그것을 막으려는 자 사이의 충돌이 주로 일어났던 지점이 국가의 잘못된 권력과 범죄, 인권 분야였다면, 무분별한 성장제일주의와 이로 인한 부작용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환경문제가 또 다른 진실과 거짓 사이의 각축장으로 부상했습니다. 오늘날 평범한 우리들의 일상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것이 총을 든 악당만이 아니라 점점 죽어가는 지구에서 비롯된 걷잡을 수 없는 환경 재해임을 더 많은 사람들이 체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됐는지, 무엇이 실질적인 행동을 가로막고 있는지를 궁금해 하고 있으며, 전후방이 따로 없는 이 새로운 전선 위에서 진실을 좇는 자와 그것을 덮으려는 자, 그리고 진실과 그것을 호도하는 거짓 간의 싸움은 점점 격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 세계 언론 자유의 날(5월 3일)을 맞아 유네스코가 정한 주제도 ‘지구를 위한 언론: 환경위기 앞의 저널리즘(A Press for the Planet: Journalism in the face of the Environmental Crisis)’이었습니다. 이날을 맞아 유네스코가 공개한 보고서 『Press and Planet in Danger(위기에 처한 언론과 지구)』에 따르면, 지난 15년간 전 세계에서 44명의 언론인들이 환경 문제를 취재하다 살해됐고, 환경 문제를 다루는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한 물리적 폭력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2019-2023년 사이에 환경 문제를 취재하는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공격이 183건 발생했으며, 이는 그전 5년의 85건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숫자입니다. 유네스코의 설문에 응답한 전 세계 129개국의 900명이 넘는 환경 관련 언론인의 거의 절반 가량(45%)은 이러한 폭력, 그리고 유·무형의 압력 앞에서 스스로 자신의 기사를 검열하게 된다고 말했는데요. 그들은 물리적인 폭력도 두렵지만,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 내부 고발자의 신원이 노출되거나 자신의 기사가 기업 등 주요 관계자의 이익과 상충하게 되는 경우에 그러한 걱정을 하게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유네스코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환경 재난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불평등과 인권 유린을 끈질기게 고발하고 있는 환경 저널리즘의 중요성에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기를 요청합니다. 지난 5월에는 그러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전 세계 환경사진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전해져야만 하는 이야기(This Story must be Told)’라는 이름으로 사진 기사를 선보이기도 했는데요. 이 사진들을 소개하면서 유네스코는 “늘 아름답지만은 않고 때론 불편하기까지 한” 이들의 작업물이 “더 건강한 지구, 더 살만한 삶을 위한 싸움”에서 우리에게 힘을 보태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언론과 저널리즘의 노력과 언론인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의 사회가 점점 ‘탈진실(post-truth)’의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와 SNS 등을 통해 감당 불가능할 정도로 범람하고 있는 정보 속에서 객관적 사실 혹은 진실이 더이상 대중의 의견을 형성하는 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데요. 이는 언론인을 보호하고 올바른 저널리즘을 지키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해지고 있다는 뜻인 동시에, 언론의 힘만으로는 이러한 탈진실의 흐름을 되돌리기에 힘이 부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할 겁니다.
쿠바의 카투니스트 ‘팔코(Falco)’가 유네스코의 2024 세계 언론 자유의 날 기념 만화 캠페인에 동참하며 그린 이 한 장의 삽화처럼, 오늘날 우리는 진실임을 확신할 수 없는 정보의 범람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제대로 된 것을 가려내고, 그것을 다시 널리 퍼트려 진실에 힘을 실어주는 일을 오로지 미디어에만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과 정의를 좇아 모두가 현장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우리 각자가 진실을 더 많이 입에 담고 이미 갖고 있는 지식과 도구를 활용해 그것을 더욱 널리 퍼뜨리게 된다면, 거대한 바다처럼 일렁이는 진실의 도저한 물결을 감히 막아서겠다고 나설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혹시 지금 마음 속에 꼭 전하고픈 진실이 있나요? 차마 꺼내지 못했던 한마디가 있나요? 무엇보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의지와 희망과 용기가 여전히 가슴속에서 요동치고 있나요? 그것이 여러분의 진심, 혹은 이 세상의 진실이라면, 당당하게 사람들과 공유하길 바랍니다. 또 기억하길 바랍니다. 전해져야만 하는 그 이야기의 여정을 혼자 외로이 걷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요.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