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유산이란 무엇인가?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외교부, 문화재청과 공동주최한 2019 유네스코 세계유산 해석 국제회의가 5월 14일 서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렸다. 올해로 사실상 4회째를 맞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해석 국제회의는 유산의 등재와 보존을 넘어선 유산 활용과 해석(interpretation)의 문제에 천착해볼 수 있는 논의의 장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세계유산 해석에 대한 높아지는 관심 때문인지, 예년보다 많은 참가자가 이번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행사장의 관계자들은 간이의자까지 배치해가며 예상보다 훨씬 많은 참가자들을 수용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행사 주최 측 대표들의 인사말에 이어, 애머스트 매사추세츠대(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erst) 닐 실버만 교수의 기조발제가 있었다. 실버만 교수는 “물리적·유형적 측면에만 집중해 유산을 정의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유산을 정의하는 새로운 방법이 없는지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유형의 유산이 지닌 무형적 가치와, 유산을 둘러싼 사회심리적 과정에 보다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유산은 불변하는 물질이라기보다 유산을 둘러싼 시대와 유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이 기조발제의 요지였다. 유산을 수동적 물질로 보지 않고, 사람, 사회와 상호작용하는 능동적 주체로 보는 시각이 참신했다.
첫 번째 주제세션에서는 알리산드라 커민스 바베이도스 박물관장과 위지에 주 호주국립대 교수가 변화하는 유산 해석의 경향성에 대해 발표했다. 커민스 관장은 “유산은 유형이든 무형이든 상관없이 단순히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창조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산은 현재 속에 과거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며, 유산을 보는 것은 과거에 대한 선택, 기록, 해석, 해설 사이에서 타협하는 열린 과정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시각을 받아들인다면 한 유산을 두고 서로 다른 집단이 서로 다른 시각을 견지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이어서 발표한 위지에 주 교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제도 내에서의 유산 해석에 집중하며 “유네스코 틀 안에서의 유산 개념은 국가 단위 회원 구조, 서구 중심주의, 국가의 소유권, 정치쟁점화, 대표성의 문제 등 다양한 도전과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주 교수는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 전문가와 관리자뿐만 아니라 유산 지역을 찾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 강화되어야 하고, 유산을 둘러싼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하려는 노력 또한 계속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두 번째 세션에서는 윌리엄 로건 호주 디킨대 교수와 암라 핫지무하메도비치 사라예보국제대 교수가 화해와 통합을 위한 유산 해석을 주제로 발표했다. 로건 교수는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원폭 돔), 비키니 환초 핵실험지 등 분쟁 현장의 유산 등재 사례를 소개하며,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남아있는 유산 지역에서 유산 해석이 지니는 의미를 강조했다. 로건 교수는 또 ‘인간의 마음에 평화의 방벽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은 우리와 다른 타인에 대한 의심, 공포, 적대감을 극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유산 해석 역시 여기에 기반을 두고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갈등이 있었던 장소라면 승자의 ‘공식 입장’뿐 아니라 여러 다른 당사자가 그곳을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하는지도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는 시각이었다. 핫지무하메도비치 교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위치한 스타리 모스트라는 다리가 보스니아 내전 당시 파괴되고, 이후 재건된 사례를 소개하며 화해와 공존을 이야기했다. 또한, 해당 사례에서 다리의 복원은 단순한 물리적 복원에 그치지 않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방식으로 복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면서 과거를 기억하고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영국의 유명한 사학자 E. H.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이번 국제회의에 참여해 여러 전문가의 발제와 참가자들의 질의 응답 및 토론을 들으며 유산 또한 단순히 위엄 있는 건물, 아름다운 예술품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을 지켜봐 왔을 인류의 유산들이 앞으로도 여러 사람들의 기억 속에 다양한 형태로 남고, 그만큼 다양한 가치와 의미를 계속 재창조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송지은 문화팀 전문관